원인 모를 고통 '미진단환자' 50만 명 "포기 마세요"

머니투데이 백선기 머니투데이 쿨머니에디터 2015.08.29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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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머니, 토닥토닥편지]<4>서울대 어린이병원의 채종희 교수가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편집자주 [편집자주|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복지지출 최하위인 나라, 한국. 경쟁에 밀리고 불안에 지친 많은 한국인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 삶을 포기한다. 그 무게를 단 1그램이라도 덜어줄 순 없을까. 여기 '그래도 괜찮아'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말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희망을 나누고 대안을 전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머니투데이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함께 전한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 기대수명이 100세로 늘어난 시대의 한 켠에선 자신의 병명도 진단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난민처럼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아다니며 육체적,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의 채종희 교수(47)가 전하는 메시지는 미진단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더 나은 삶을 향한 용기를 준다.

- 아픈데 이유 모른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간 원인 찾을 수 있어
- 'CGH 어레이 검사' 등 신기술 발달하면서 염색체이상 진단율 10배 이상 높아져
- 병명 진단 받으면 불필요한 검사 줄여 비용 감소, 합병증 예방 가능
- 첫애가 염색체 이상 있어도 부모 정상이면 건강한 둘째 낳을 가능성 90%
- 해외에선 10년전 보편화된 기법...국내 적용 위해 연구에 박차




서울대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에서 진료 중인 소아청소년 신경분과 채종희교수서울대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에서 진료 중인 소아청소년 신경분과 채종희교수


오늘 오전에만도 60명이 넘는 환자가 왔어요. 제 환자 중에는 평균적으로 4~5군데의 병원을 돌다가 결국 병명을 진단받지 못한 채 찾아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미진단질환 아이들’이라 부릅니다. 애가 아픈 것도 힘든데 원인조차 모르니 그 부모 속이 얼마나 타들어가겠어요?

이처럼 희귀난치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 수가 국내에만 무려 5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희귀질환종류는 7700여개나 되고요. 희귀질환은 대부분 유전자 손상으로 발생하는데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에요. 이들은 확실한 진단명이 없어 희귀질환 진료혜택을 위한 국가적 지원을 받을 수도 없어 완전 의료사각지대에 놓여 있지요.



하지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전 세계 의료진들이 머리를 맞대고 계속 연구를 하고 있고 새로운 진단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그 중 하나가 CGH 어레이(comparative genomic hybridization array 이하 어레이) 검사에요. 환자의 혈액에서 추출한 DNA를 활용한 검사법으로 우리 말로 하면 비교 유전체 보합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검사법은 여러 가지 복합기형을 가지면서 정신지체이거나 학습장애 등 인지기능 장애를 동시에 가졌지만 원인을 모르는 미진단 질환자들에게 유용해요.

저희 병원에서는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한 의료와 복지를 지원해주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하 생명보험재단)의 도움을 받아 5년째 이 검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과거 3%에 불과했던 염색체 이상 진단율을 20%까지 끌어올렸답니다. 처음 재단에서 검사비 지원결정이 났을 때 정말 기뻤어요. 환자가 진단을 받은 후 치료비를 지원하는 곳은 많지만, 진단 전 검사비를 지원하는 곳은 거의 없거든요. 진짜 희귀질환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서울대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에는 여러병원을 옮겨다니면서 중복검사를 받았으나 진단을 받지 못한 환자들이 많다.서울대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에는 여러병원을 옮겨다니면서 중복검사를 받았으나 진단을 받지 못한 환자들이 많다.
일반 사람들은 '진단율 20%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건 천양지차이에요. 애가 아픈 원인을 몰라 답답해하던 부모님들에게 검사결과 몇 번 염색체에 미세결실, 미세중복이 있다고 답을 주면 일단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진단을 받지 못한 채 미로를 헤메듯 지낸 시간들이 고통스러우셨던 것이죠.


염색체를 새것으로 바꿔 줄 수 없기 때문에 병을 고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원인을 알게 됐으니까 앞으로 전개될 병의 양상을 예상해서 치료계획을 수립하고 합병증을 최대한 줄일 수는 있습니다. 불필요한 검사를 할 필요가 없어 경제적 부담도 덜게 되고요.

장애아가 태어나 평균적으로 진단을 받을 때까지 평균 3.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옆에서 도와주는 비용이 미국에서 추정한 금액이 40억 원이라 해요. 그런데 앞으로 발병할 수 있는 장애를 예측해서 미리 준비하면 20억 원으로 줄일 수 있다는 통계가 있어요. 사회적 비용도 그만큼 크게 줄어드는 거죠.

첫째 아이가 정상이 아닌 경우 부모님들은 두 번째 아이 낳기를 두려워하세요. 그도 그럴 것이, 복지가 잘 갖춰진 나라에서는 아픈 아이가 태어나면 국가가 함께 키워주지만 우리나라에선 온전히 부모한테 감당해야 할 몫으로 주어지니까요. 하지만 의료인으로 과학자로서 감히 말씀 드리는데 부모가 검사 상 이상이 없다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 확률이 90% 대로 훨씬 높습니다.

미경 엄마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생계로 장사를 하며 맞벌이를 하는 미경엄마는 여러 병원을 돌다 4번째로 저희 병원을 찾았어요. 3살인 미경이는 구개열도 있고 얼굴도 이상하고 잘 안 먹고 안 자라서 MRI부터 시작해 온갖 돈 많이 드는 검사를 많이 하고 왔어요. 그러느라 미경 엄마는 직장도 그만두었지요.

어레이 검사를 해보니 미경이는 4번 염색체 미세결실 증후군이었죠. 다행히 부모한테는 이상이 없었어요. 미경 엄마는 유전자 검사와 유전상담을 통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용기를 내서 얼마 전 건강한 딸을 출산했어요. 동생이 생기니까 미경이도 샘을 내면서 조금씩 더 시도하려고 한다면서 그때 검사를 받고 아기를 갖길 잘했다며 기뻐하시더군요. 미경 엄마는 다시 일도 시작하셨어요.
유전자검사에서 부모가 정상이라면 첫애의 장애와 관련없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을 가능성이 90%정도다./사진제공=생명보험재단유전자검사에서 부모가 정상이라면 첫애의 장애와 관련없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을 가능성이 90%정도다./사진제공=생명보험재단
실제로 장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을 보면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건강한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면서 좋아지고 정상의 아이는 남을 배려하고 보살펴 줄 줄 아는 넉넉한 아이들로 성장하더군요.

물론 그 길이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우선 어레이 검사와 같은 신기술엔 고가의 검사장비가 필요해요. 또 법이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국내에선 합법적으로 검사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상황이구요. 이 같은 어려움들은 희귀난치병처럼 수가 적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분야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전 의사이니까 논문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갑니다.

저는 병원 내 의학윤리위원회(IRB)의 허가를 받아 이 검사를 시행하고 있는데요, 전제조건이 환자에게 해를 주지 말아야 하고 부담액이 0원이어야한다는 겁니다. 어레이 검사의 경우 검사재료비로만 70만 원이 드는데, 다행히 생명보험재단에서 한 해 47명의 환자들의 검사비를 지원해줘서 연구진들이 재능 기부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제 연구비를 보태 지난 5년간 약 500개 사례를 모았어요. 이 사례를 바탕으로 현재 논문을 쓰고 있어요. 논문이 발간되고 나면 국가 관련기관에 의료기술로 인정해줄 것을 정식 요청할 거에요. 외국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보편화된 기법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보험으로 커버되고 보험수가 산정기준 안에서 환자가 조금만 돈을 내고 검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검사의 혜택을 받을수록 단가도 낮아지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단을 못 받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지는 저도 정확히 몰라요. 그러나 외래환자를 보면 그 수가 엄청나다는 걸 체감하게 됩니다. 그 중에는 10~20년이 지나도 진단을 받지 못한 채 꾸준히 병원을 찾아주는 환자들도 있어요. 고맙게도 그분들이 단념하지 않고 꾸준히 찾아와주는 덕분에 매년 5% 정도의 환자에게서 원인을 새롭게 찾아내고 있어요.

하지만 미진단환자들이 중도에 포기하면 저희 의사들도 원인을 밝혀 낼 방법이 없어요. 환자나 가족 분들 중에는 ‘간혹 언제 좋아지는 거냐? 진단만하고 어쩌자는거냐?’라고 짜증을 부리거나 심지어는 제게 화를 내시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의사들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의사들도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을 해결해가면서 혹시 ‘내가 못 찾은 게 뭐가 있나? 새로 보고된 사례나 기법이 없나? 혹시 비슷한 사례가 없나?’ 계속 리뷰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해법을 찾을 때가 있어요. 저는 내원한 미진단 환자 중 10%만 원인을 찾아내도 정말 잘 하는 거다라는 생각으로 진료에 매진하고 있답니다.

희귀질환은 상당수가 유전자 손상으로 발생하는 데 그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환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희귀질환은 상당수가 유전자 손상으로 발생하는 데 그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환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저 역시 회의감이나 절망에 빠질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저를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건, 10~20년이 지나도 꾸준히 찾아주시는 다수의 환자와 그 가족 분들입니다. 부모님들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뭔가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는가라는 희망을 가지고 저를 찾아오세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제일 많이 도와줄 것이라고, 부모가 아이의 옆에 있어주듯이 끝까지 아픈 아이의 옆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주십니다.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저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장 진단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절망하지 말고 좋은 선생님과 좋은 연구진을 찾아가 믿고 계속 함께 가세요. 희귀질환이란, 그렇게 극복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6개월만에 저를 찾아온 경훈이 엄마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제게 자랑을 늘어놓으셨던 일이 떠오릅니다. “선생님 드디어 우리 애가 3개 단어를 말했어요”라고요. 1년에 단어 하나가 늘었다고 기뻐서 환하게 웃는 엄마, 그 애틋한 마음을 잘 알기에 오늘도 많은 의료진들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팁] CGH어레이 검사를 받으려면?
혈액으로 시행하는 이 염색체 검사는 통상 '어레이 검사'라 불린다. 선천성 다발성 기형과 정신지체 혹은 발달지연을 나타내는 환자들과 증후군이 의심되는 환자의 염색체 이상 유무를 알기 위해 실행된다.

어레이 검사는 통상적으로 일반 병원에서 시행하는 염색체 분석 검사보다 훨씬 앞선 기술이다. 세포 배양을 하지 않고 DNA를 사용해, 전체 염색체를 분석하면서도 검사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또 염색체의 아주 작은 결실 및 중복까지도 진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희귀질환센터는 2013년 일반염색체 검사에서는 정상으로 판정받은 환아 137명에 대해 어레이 검사를 시행한 결과 28명(20%)에서 염색체이상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 센터는 생명보험재단의 지원을 받아 희귀난치성질환을 앓는 아이들 중 극빈층이나 차상위계층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염색체 이상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원 받는 방법에 대해선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www.snuh.org/child/) 희귀질환센터에 문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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