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과 관련한 사회집단에서 절친하다고 믿었던 지인이 몇 명 있었다. 그 가운데 곤경에 처한 나를 따뜻한 관심으로 위로했던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이 일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한 사람은 변호사 자문까지 받아가며 매섭게 공격해왔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간곡한 부탁을 무응답으로 거절했다. 이런 지인들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나름대로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어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겪으며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가 생각났다. 미리엘 주교는 갓 출소해 갈 곳 없던 장발장을 재워줬지만 장발장은 은그릇을 훔치는 것으로 미리엘 주교의 친절을 배신한다. 하지만 호의를 배반당한 미리엘 주교가 경찰에 잡혀 온 장발장을 향해 보인 반응은 분노나 경멸이 아니라 은촛대까지 함께 주는 상상할 수 없는 용서와 호의였다.
성경에는 배신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예수의 애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라고 3번 부인하는 사건이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알고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했다는 점이다. 예수는 배신할 것을 알고도 끝까지 베드로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한 농부가 아들에게 옆집에 가서 낫을 빌려 오라고 했다. 이웃은 낫을 빌려주지 않았다. 얼마 뒤 이웃이 찾아와 낫을 빌려달라고 했다. 농부는 아무 말 없이 낫을 빌려줬다. 아들이 기가 막혀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이웃은 우리에게 낫을 빌려 주지도 않았는데 왜 빌려주는 겁니까” 농부가 아들에게 대답했다. “낫을 안 빌려줬다고 나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건 복수다. 낫을 안 빌려줬지만 그럼에도 나는 빌려준다고 생각하고 빌려준다면 그건 증오다. 낫을 안 빌려줬던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낫을 빌려주면 그건 사랑이다.” 농부의 이웃은 이후에도 낫을 빌려주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일도, 미래 일도 생각하지 않고 백지 같은 마음으로 낫을 빌려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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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을 보면 일 자체보다 그 일과 관련된 사람 때문에 더 절망하는 모습을 본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수를 꿈꾼다. 복수가 사실상 어렵거나 자신에게 실익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마음으로 불같이 증오한다. 사랑은 인간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시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불신의 벽을 쌓아올려 감옥 같은 인생을 살게 될 뿐이다. 언제 누가 배반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하라. 배반당할 것을 알고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