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은 상궁 김개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비상한 재주 덕분에 임금의 총애를 얻고 권력을 휘두르다가 끝내 나라를 그르친 악녀다. 드라마 ‘화정’에 등장하는 김개시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광해와 내통해 선조를 독살하고, 대비에게 저주의 누명을 씌우는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후궁도 아닌 일개 궁녀가, 과연 이런 엄청난 일들을 벌일 수 있었을까? 정말 광해는 김개시에게 놀아나는 바람에 왕좌에서 쫓겨났을까?
선조 독살설만 해도 그렇다. ‘연려실기술’은 ‘선조가 동궁에서 올린 약밥을 먹고 세상을 떠났는데, (독)약으로 임금을 시해하는 참변이 개시의 손에서 나왔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가 광해의 죄목에 부왕(선조)을 죽였다는 항목을 집어넣으며 거꾸로 짜 맞춘 설이다. 정황은 있지만 근거는 미흡하다. 오죽하면 인조가 힘써 이 설을 물리쳤을까. 그는 선조가 위독할 때 자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며 독살설을 부인했다.
김개시는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부풀려진 인물이다. 사실 그녀는 궁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김개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 궁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의 궁녀는 대체로 공노비 출신이 많았으며 주종관계가 확실했다. 한 번 처소에 배정되면 그 주인이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 대전에서는 임금이, 중궁전에서는 왕비가, 대비전에서는 대비가, 동궁에서는 세자가 하늘이다. 업무는 지밀(침실), 침방(의복), 수방(자수), 소주방(식사), 생과방(간식), 세수간(목욕), 세답방(빨래) 등으로 나누고 주인의 시중을 들며 능력을 길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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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는 동궁에서 광해와 인연을 맺고 대전까지 오랜 세월 함께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를 향한 그녀의 충성심은 일하는 데 거추장스럽다 하여 후궁 자리까지 마다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개시가 인목대비의 대척점에 선 것도 바로 이 주종 간의 의리 때문이다. 그녀는 광해를 위해 대비의 수족을 잘라내고 힘을 무력화시켰다. 심지어 대비전의 궁녀들까지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했다. 인목대비는 이를 갈면서 별렀을 터.
인조반정이 일어난 다음날(1623년 3월 13일), 김개시는 정업원 근처 민가에 숨어 있다가 현장에서 칼을 맞았다. 주인 대신 척살대상 1순위에 오른 것이다. 뒤늦게 반정주역 중 한 사람인 김자점과 거래를 해봤지만 틀어진 모양이다. 광해의 음지에서 권력의 양지를 넘본다 한들 궁녀인 그녀가 발 디딜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