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쳐 톡톡]지금 시간 10시 반

머니투데이 황인선 문화마케팅 평론가 2015.05.30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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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선의 컬쳐 톡톡]지금 시간 10시 반


5월이 거의 끝났다. 봄꽃들은 졌고 나무들은 성장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고 태양은 5시부터 빛을 쏘며 여름을 예고한다. 지금, 등산객들은 사춘기 산의 초록 잔치에 취하고 골퍼들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 파란잔디에 울랄라... 5월의 갓 신혼들은 아침저녁 무시로 사랑에 들떠 있을 시즌이다. 여드름 학생들은 중간고사 성적표에 바짝 긴장하고 남보다 먼저 사는 직장인들은 벌써 상반기 실적 평가를 준비할 시즌이기도 하다. 긴장과 약동의 시간. 카이로스(의미의 시간)와 크로노스(물리적 시간)시간이 있다는데 지금 시간을 크로노스 시간으로 보면, 양력 일 년으로 5/12가 지난 시간이겠으나 계절 주기와 음력으로 보면 4월 중순이니 이제 봄이 갓 지난 시즌이고 그걸 하루 시계로 환산하면 아침 10시 반 정도. 직장인들의 9 to 8(?) 시계에서 아침 회의 후 일에 막 스피드를 올릴 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크로노스 시간표에서 잠시 제외돼 있다. 2주 전부터 6회 목표로 매주 한 번 고궁 투어를 시작한 때문이다. 고궁은 언제나 24시 이후 텅 빈 시간에 위치할 거니까. 고궁 투어 1차는 창덕궁 ‘후원- 아침의 산책’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역사를 되찾아 가는 국악 단체 여민(與民) 초대로 찾은 창덕궁 비원(Secret Garden)은 내가 중학생 시절 비 맞으며 백일장을 봤던 곳이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이가 들어 보니 창덕궁엔 조선의 건축과 문양 철학과 왕의 위엄이 있었다. 붉고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나무 한그루 없이 거대삭막한 자금성이나 돌바닥에 삐죽 뾰족한 유럽 성과는 달리 조선의 궁은 숲과 물의 자연에 소박하게 자리했다. 창덕궁엔 동 아시아 우주론의 기본 명제였던 천원지방(天圓地方)을 곳곳에 반영한 건축 철학, 풀과 나무와 용봉과 박쥐와 물고기와 구름 문양의 조화 그리고 존덕정엔 신하를 물, 스스로를 달에 비유한 정조의 위엄이 있었다. 어린이용 고전만 알다가 나이가 들어 문득 원본 고전의 아우라를 본 기분!

다음 주는 창경궁이다. 30여 년 전에도 나는 거기를 갔었다. 그때는 동물원 창경원이었다. 이제는 복원됐으나 그래도 창경(昌慶)이라는 경사스런 이름과는 달리 슬픈 궁. 말년의 태종을 위해 세종이 지은 수강궁에서 시작했지만 인현왕후, 혜경궁, 소현세자 등이 병들고 핍박받고 독살로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비열하고 무례하게도 궁의 대부분을 헐고 동물원을 만들어 조선을 모욕했다. 자경전 터, 앙부일귀, 성종대왕 태실을 일람하고 일제가 지은 온실 수목원을 거쳐 돌아 나오다가 정문 왼쪽에 난 선인문을 들어가면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자리가 있고 아마도 그를 고스란히 목격했을 회화나무 두 그루가 심란하게 엉켜있다는데 기록이 분명치 않다. 너무 다른 두 고궁, 창덕궁을 같이 갔던 지인들은 이 창경궁에서는 별로 말이 없다. 다음엔 운현궁과 종묘를 갈 것이다. 거기는 어떨까?

나로서는 고궁을 세 번 돌면 5월이 일단 끝난다. 현실로 돌아와 다시 시간을 본다. 일 년 중 오전 10시 반이 막 지난 시간. 뜬금없이 나는 10시 반 이 시간이 현재 한국의 시간이길 바란다. 경제, 문화, 정치... 창조, 각성, 사유 모든 것에. 고궁은 역사의 시간표를 다시 찍어보게 하는 힘이 있나보다. 내가 틀렸다. 고궁은 24시 이후도, 텅 비지도, 고요하지도 않았다. 우-웅, 쩌-엉, 콰-아, 고-오 고궁의 소리는 너무 크게 들렸다. 나는 내 시계를 다시 맞추련다. 10시 반으로. 항상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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