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이 울려펴진 이유

머니투데이 공영희 소설가 2015.03.2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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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희의 러시아 이야기]<49>러시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이번 주 초는 아침 온도가 영하를 밑돌았다. 마지막 꽃샘추위라고 했다. 언제든지 마지막을 지나고 거쳐야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시작되어진다. 마지막 꽃샘추위가 지나면 계절의 왕이라는 “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타날 것이다.

이번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이었고 여러 가지 문화행사에 혜택을 받는 날이기도 하다. 박물관과 고궁도 무료가 많고 영화도 반값이다. 그래서 지갑이 가벼운 젊은이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 문화혜택을 받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필자도 수요일 저녁,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궁인 덕수궁 석조전(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에서 열리는 “음악으로 역사를 읽다” 라는 음악회에 다녀왔다. 흔히 클래식 연주라고 하면 별다른 타이틀 없이 그냥 클래식 연주구나 하는데 이번에는 음악으로 역사를 읽는다니 생소하기도 했지만 흥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녁 7시에 시작된 음악회였는데 대한제국역사관 석조전은 양식의 궁궐이었다. 조선의 비운의 황제 고종이 사셨던 곳이었다. 석조전은 자주적 근대화 황국의 꿈을 담아 1900년에 건설했지만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완공되어 일제 시대에는 영친왕이 임시숙소로 사용했던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긴 회한의 궁궐이기도 한다. 마지막 왕이 서구 열강의 화려하고 큰 궁궐에 비해 작고 크게 화려하지 않은 궁궐에 갇혀 사시면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슨 힘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멍해지고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밀사를 보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별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되살릴 수 없기에 매일 밤잠을 못 이루시고 고뇌하셨다고 한다. 나라 없음이 얼마나 불운하고 고달픈지 우리 국민은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이런 장소에서 열린 음악회는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이 연주 되었고 고종황제가 가장 좋아하셨다는 몽금포 타령을 클래식 버전으로 편곡해 연주할 때는 모두 숙연한 표정들이었다. 고종 황제 시대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이 연주된 것은 의외였는데 피아니스트 송세진의 해설에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는 전설적인 기교를 가졌다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1917)때 견디지 못하고 조국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1918년 완전히 미국에 정착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늘 조국인 러시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러시아적인 냄새가 강하고 우울하고 가슴을 죄이는 듯한 고통과 폭발적인 분노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국을 등진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도 조국이 있으나 내 조국이 아닌 상태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라흐마니노프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도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을 러시아에 살면서 내 조국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지, 떠나 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떠나 있는 자들에게 조국은, 고향은 늘 그리운 곳이고 눈물짓게 만든다.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만난 분이 고려인 협회 회장이었는데 그는 허왕산 이라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손자였다. ‘웅배’라는 이름은 만주에서 허왕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전력투구할 때 김좌진 장군이 자주 댁을 오셨다고 한다. 그 때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셨을 때 어린 손자는 김장군의 무릎에 누웠다고 한다. 그래서 김좌진 장군이 커서 큰 힘을 펼치는 사람이 되라고 웅배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며 늘 자랑을 하셨다.

러시아 연해주는 물론 모스크바에도 의외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중국이나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후손들로 이름도 없이 사는 분들도 있고 이름이 있는 분들도 계셨다.

필자가 만난 분들 중에 임시정부 시절 재정을 받았던 최재형 독립투사의 손자, 그리고 구 한말 재러한국상주공사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 외교관이었던 이범진 공사의 손주 며느리도 뵌 적이 있었다. 손주 며느리는 러시아 여자로 아주 평범하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범진 공사는 조선이 일본과 합방되자, 1910년 러시아에서 통탄을 하며 자결을 했다. 이런 사실에 러시아 황제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이위종도 러시아에 살면서 러시아 황제의 특별한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분들의 자손과 이름 떨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유복녀도 만날 수 있었고 그 분들을 만나면서 고생했던 어린 시절과 일제의 만행을 들을 수 있어 내 조국의 귀중함을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고 필자의 자녀에게도 조국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대해 확고한 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러시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아주 큰 만족감과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사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분들에게 얼마나 큰 부채를 지니고 있는가.

러시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자의에 의한 러시아 생활이 아니라 나라를 찾겠다는 구국일념을 가진 선조의 뜻에 따라 본의 아니게 타국에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 아닐 수 없다.

덕수궁 석조전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이 울려펴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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