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우수상]경매, 행복한 경제를 가르칩니다!

머니투데이 정현수 기자 2015.01.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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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경제신춘문예]박혜균·수기

[경제신춘문예 우수상]경매, 행복한 경제를 가르칩니다!


1. 가난한 우물 안 개구리

2006년 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친정은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농신보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에서 대출받은 4억원의 대출금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일흔의 연세에 생전 처음 사업을 시작하셨다. 군(郡)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영농종목이긴 했지만, 자금 조달에 대한 부담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아버지께서는 항상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셨다. 이자를 납입해야 하는 분기말이 되면 자식들 중 누군가에게 돈을 가져가시는 것이 행사처럼 되면서 사업은 겨우 현상유지만으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하긴 자식들이 대신 불입하는 이자까지 비용으로 계산한다면 아버지의 사업은 적자였다. 농업과 관련된 업종이라 국제화 시대에 그리 전망도 없어 보여 ‘그만 접자’는 우리들의 부탁에도 아버지께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남들이 볼 때도 위태하게 이끌어가던 공장은 아버지의 암 말기 투병생활 돌입과 동시에 서서히 허물어져갔다. 병원에서는 6개월의 시한부를 말씀하셨다. 주변에서 ‘파산 선고’를 말씀드렸지만, 아버지께서는 하고 싶지 않아하셨다. 어머니조차도 ‘평생을 관직에 몸 담았던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파산’이라는 단어자체는 더 이상 언급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6개월의 시한부도 채우지 못하고 말기암 진단을 받은 3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돌아가심은 남아있는 처자식들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자식들은 한정승인 상속 포기서를 제출해야 했다. 한정승인은 어머니께서 받기로 하셨고, 아버지 명의의 모든 재산은 채권자의 신청에 의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선산과 전답, 어머니가 사셔야 할 집까지 모두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의 요령 없음을 말씀하시곤 했다. “사업한다는 사람이 재산이나마 다른 사람 명의로 좀 돌려놓던지. 우째 일을 저래 해놨노? 사람이 너무 곧아도 저런 사태가 나는구먼.”

맞은 말이었다. 농신보는 철저하게 신용만으로 대출을 해주는 곳이어서 아버지께서 마음만 먹었다면, 부동산을 모조리 자식들에게 증여하거나 다른 사람의 명의로 이전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명의 이전’을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내가 진 빚이 있는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자식들이 편법을 배울 거다’며 거절했던 아버지셨다. 아버지의 평소 성격을 아는 터라 자식인 우리나 어머니도 그런 편법을 쓴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논밭과 선산이 없어지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살 집이 없어지게 된 거였다.



아버지의 부동산은 경매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농협과 농신보의 대출 외에 사채등의 다른 대출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집은 대지와 건물의 소유자가 달라서인지 입찰자가 없어, 두 번째 경매에서 우리가 낙찰 받을 수 있었다는 거였다. 어머니는 평생을 살아오셨던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셨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언니네가 갈 곳이 없어진 거였다. 아버지 공장에서 일을 했던 언니네는 회사 사택에서 거주를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공장의 모든 것이 채권자의 처분에 맡겨진 터라 사택을 비워주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공장에 들어오기 전에 건강이 좋지 않은 두 아이 때문에 있던 집도 팔아버린 터라 갈 곳이 없어져 버린 언니네.

그때 엄마가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나마 네가 여유가 좀 되니까 언니가 살 집을 좀 구해주면 안되겠니? 너도 몸이 아파 나중에 시골로 들어온다고 했으니 지금 사놓고 너희들이 들어올 때까지만 언니네가 살게 해주면 그동안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엄마가 말씀하신 ‘여유가 된다.’는 의미는 내가 부자여서가 아니라, 학비가 지출되는 아이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씀이셨다. 바로 위의 언니나 동생들은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일찍 결혼한 나만 딸아이가 이미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보실 때 여유가 좀 있어보였던 거였다. 솔직히 그럴 형편은 되지 못했지만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시골에 집을 보러 다녔다.

물론 엄마의 말씀대로 ‘만성 신부전이 더 진행되어버리면 우리도 시골로 귀촌할 거니까 대비한다’는 목적도 포함이 되었다. 하지만 시골 집값이 예전에 내가 알던 시세가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시골의 집값은 기준이 없어, ‘이 가격이 비싼 건지 싼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동산 중개인이 ‘이 정도면 괜찮은 겁니다.’라고 하면 ‘괜찮은가 보다’하고 생각해야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럴싸한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형부는 아버지의 공장에 합류하기 전에 건축 관련 일을 하셔서 각종 자재나 공구를 넣어둬야 할 창고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는데, 그런 집도 드물었다. 거의 한 달간을 휴일마다 영덕의 구석구석을 다녀봤지만, ‘우리가 노후에 들어와서 살 만한 집이면서, 우선은 언니네가 살기 좋은 집’을 구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결국 조금은 지친 상태에서 언니에게 ‘창고고 뭣이고 그냥 빌라 전세는 어때?’하고 물어봤지만, 형부가 다시 건축일을 하기 위해서는 창고가 있는 넓은 집이라야 했다. 남편도 ‘나는 어릴 때부터 마당이 좁은 집에 살아서 그런지 마당 넓은 집이 좋더라. 그러니 무조건 마당 넓은 집을 사야 해. 차도 쑥쑥 잘 들어갈 수 있고’하면서 채근을 해댔다. 그런데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 쉽게 매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때 중개인이 ‘혹시 경매라고 아는지요?’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의 전 재산이 경매로 넘어간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경매’라는 단어를 들으니 가슴 한 쪽이 싸한 느낌이 들었다.

“경매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돈으로 접수하는?” 내 말에 중개인은 깜짝 놀라면서 ‘무슨 말씀을?’이라며 정색을 하셨다. 나는 내가 들은 경매에 대한 이야기를 모조리 한꺼번에 쏟아 넣고 마무리를 이렇게 했다.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나온 부동산을 싸게 사는 것이니까 나쁜 거죠?” 중개인은 경매에 대한 나의 오류에 어이가 없는지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정정해주었다. “만약 A라는 사람이 금융사에 돈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걸 아주머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아무도 응찰하지 않아요. 경매는 유찰되면 급속도로 가격이 하락해요. 만약 A의 채무가 100인데 계속 유찰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집은 집대로 항상 매각상태이면서 빚도 상환 안되는데 A는 긴장상태로 살아야 해요. 만약 유찰이 되다가 30정도에 낙찰이 되었어요. 그러면 A는 30에 대한 빚만 상환되고 나머지 70에 대한 빚은 계속 다른 방법으로 상환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경매에 입찰한다는 것은 채무자의 빚을 상환해주는데 일조하는 겁니다.”

나는 그때까지 ‘빚이 100인데 경매낙찰가격이 50이면 나머지 빚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50도 갚아야 하다니. 이런 내 생각을 말했더니 중개인은 어이가 없는지 한참동안 웃었다. “아주머니네는 한정승인 상속포기이니까 경매가 얼마에 되던 빚을 털어내는 것이 맞아요. 그게 아니면 차액의 빚은 남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매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입찰을 빨리 해주면 좋은 거예요.”

2. 경매 세상으로 가보자

경매.
태어나서 법원에 갈 일은 전셋집을 구하느라 등기부등본을 발급받기 위해 간 일이 전부인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내가 들은 경매는 ‘폭력조직이 경매장을 휘젓고 다녀 일반인들은 범접하기 힘든 위험한 곳’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내게 경매로 집을 사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중개인은 ‘제가 경매를 대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그러니까 낙찰을 받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대신 경매를 받아 드릴 테니 소정의 수수료만 주면 됩니다.’라며 경매에 대한 내 두려움을 대신 감당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 수수료라는 것이 우리 형편에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중개인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야’하면서 펄쩍 뛰었다. 둘이서 함께 인터넷의 법원의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영덕에 알맞은 집이 경매물건으로 나와 있나를 찾아보았다. 주소가 있으면 그 주소로 포털사이트의 지도에서 위치를 찾아보며 자동차의 진입이 쉬운지 마을에서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대조하며 우리에게 맞는 집을 찾아냈다. 대지가 660㎡(200평)에 2차선 도로를 끼고 있는 조용한 농촌에 위치한 집이었다. 집은 조립식 주택이었는데 33㎡정도 되는 창고가 같이 있었다. 이미 1차에서 유찰이 되어 가격이 4100만원으로 떨어져 있어, 우리 형편에서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보니 근저당과 가압류가 6개나 잡혀있는, 그러니까 등기부등본만으로 보는 초보의 입장에서는 권리 관계가 꽤나 복잡한 집이었다. 현장을 방문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 집은 시댁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시댁에 갈 때마다 본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경매 정보에는 집이 현재 비어있다고 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영덕에 있는 언니에게 집 위치를 얘기하고 한 번 가보라고 했다. 다만 좀 복잡한 법률관계로 얽힌 집인 듯하여 중개인에게 경매를 맡길까 하다가 수수료가 아까워 그때부터 경매에 대한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경매날짜까지는 아직 20여일이 남아 있었기에 일단은 경매와 관련한 책을 두 권 구입하여 저녁마다 공부를 했다.

잘 모르는 것은 경매카페에 가입하여 질문을 하면 두세 시간 뒤면 답글이 달려, 책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숙지를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해보니 내가 낙찰 받고자 하는 집은 근저당이나 가압류가 많아도 일단 경매를 받기만 하면 권리 정리는 간단한 집이었다. 집을 가본 언니도 너른 마당과 창고까지 있으며, 현재 비어있어 언제든 이사를 해도 될 것 같다며 좋아했다. 세입자가 없는 것도 이점이었다.

2월 27일. 경매입찰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당시 우리가 살던 도시에서 영덕까지는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가지 못하고,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니 버스를 이용해서 움직여야 했다. 경매 최저가가 42200만원이어서 남편과 함께 4500만원을 쓰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입찰 보증금을 수표와 현금으로 나눠서 버스를 타는 일은 좀 불안했다. 이렇게 큰돈을 갖고 다닐 일이 없어서인지 큰돈이 핸드백에 있다는 것이 불안감을 가져다 주었다. 남들은 이보다 몇 백배 많은 돈도 잘 갖고 다니던데 나는 500만원을 갖고도 잃어버릴까봐 덜덜 떨면서 법원으로 갔다.

시골법원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와 있었다. 법원 경매를 처음 와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덤덤한 척 사람들 사이에 끼여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아줌마들은 경매를 많이 해본 사람들인 듯 안내지를 들고 해당 물건에 대한 권리 분석과 차후에 남길 이익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매로 낙찰을 받아 웃돈을 붙여 매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세상물정과는 상관없이 그냥 집안 살림만 해온 내가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내가 낙찰받고자 하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들이 도박해서 날린 거래. 아버지가 사준 집을 아들이 날려먹은거지’
‘원래 식당을 했던 곳이니까 낙찰 받으면 식당을 하면 괜찮을 거야. 7번국도에서 바다로 가려면 그 길을 무조건 통과해야 하니까 입지가 좋은 곳이지’
‘아들이 그 집에 살다가 야반도주했다면서. 지금 빈 집이라 인도 명령 필요 없이 명도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사진으로 봤을 때 마당이 넓었던 이유가 식당이었기 때문이었음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마당이 아니라 주차장이었던 거였다. 입찰이 시작되었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서류를 작성했다. 남편과 얘기했던 4500만원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결국 나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파악하며 낙찰받을 수 있는 가격이라 생각했던 4680만원을 써넣었다.

첫 경매에서 낙찰을 받았다. 내가 응찰한 물건에는 총 8명의 응찰자가 있었는데, 차순위와 나의 응찰가격 차이는 고작 30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낙찰자 발표를 듣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렸다. 남편은 내가 임의로 써넣은 금액에 ‘신통하네!’하면서 칭찬해주었고, 그 집에 들어가서 살 언니에게도 연락을 해주었다. 언니는 ‘너희들이 시골에 들어올 때까지만 그 집에서 살게’하면서 무척 고마워했다. 이제 문제는 낙찰대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몇 천만원을 쌓아놓고 살지 않으니 은행의 신세를 져야했다.

경매 전에 우리가 주로 거래하는 은행에 대출 여부를 물어봤을 때, 담당자는 ‘그 정도 금액이라면 OK’라고 했었다. 그런데 낙찰을 받고 대출을 요청하러 갔더니, 대출 담당 과장님께서 난색을 표명하는 거였다. 남편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을 하고 있어서였다. 당시 우리는 은행에 월50만원씩 적금을 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금융 거래도 그 은행에서만 했는데, 대출 불가라고 하니 앞이 캄캄했다. 결국 나는 우리가 거래해 온 내역서와 신용등급을 좀 봐달라고 했다.

갚을 여력이 된다고, 신용카드등 각종 공과금을 단 한번이라도 연체한 적이 있느냐고 항변을 했고 그 항변이 받아들여져 40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평소에 핸드폰 요금 하나조차도 연체하지 않으며 신용관리를 잘 해둔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일단 대출을 받아두고 낙찰을 받은 일주일후에 언니와 함께 낙찰 받은 집으로 가보았다. 유리창으로 들여다 본 본채에는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다. 창고도 비어있었다. 나는 집의 상태를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집과 창고의 빈 상태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낙찰 받은 집의 뒷집은 내가 낙찰 받은 집 주인의 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그분께 전화번호를 남겨드리고, ‘앞으로 앞뒷집으로 살게 될 터이니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비어있고 뒷집에 부친이 살더라고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경매를 받으면 이사비라는 것이 있다는데 우리는 돈도 없고 지금 비어 있으니 그냥 100만원정도 드리면 될 것 같다’고 말해 그렇게 하자고 의견을 맞춰놓았다.

3. 낯선 세상은 너무 어려워

그런데, 일주일 정도 뒤에 일이 터져버렸다.
집 주인이 일반적으로 낙찰금액의 10%가 이사비라며 500만원을 달라는 거였다. 거기에다가 창고건물은 조그만 건설사가 임차로 있으니, 창고 이사비 300만원까지 보내주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분명히 집이 비어있었는데, 무슨 이사비냐고 했더니, 도리어 무슨 말이냐며 화를 냈다. “와서 보세요. 집에 살림살이가 그득한데 무슨 빈집이라고. 저 짐을 전부 옮겨야 댁도 이사를 올 거 아닙니까? 시간 끌어 힘들어하지 말고 그냥 창고까지 한번에 싹 비워줄테니 건설사 이사비까지 800만원만 주면 됩니다.”

그 말에 부랴부랴 언니에게 그 집을 가보라고 했더니, 세상에나! 집안 가득 온갖 살림살이가 있다는 거였다. 창고에는 낯선 건설사 간판까지 붙어있다는 언니의 말을 들으니,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싶어 걱정이 쌓였다. 빈집이어서 홀가분하게 명도를 받을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거기에다가 창고건물을 임차했다는 건설사까지 이사비를 달라며 전화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을 비워줄 수 없으니, 법원에 계속 들락거리면서 명도소송까지 해보라며 엄포를 놓는 거였다. “아마 명도까지 가는 소송보다는 제가 달라는 금액을 주는 것이 더 싸게 먹힐 겁니다.”

그러잖아도 당장 풍족하지 않은 돈으로 등기에다 취·등록세까지 납부해야 하는데 최고의 걸림돌이 생긴 셈이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아 조언을 얻을 곳도 없었다. 법무사 사무실에 경매 건물 인도나 명도에 대한 상담을 했더니, ‘법원에 접수하는 문서 한 장당 30만원의 대행료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경매카페에 질문을 올렸더니,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기 위해 경매를 했는데, 이런 일 저런 일로 돈을 지출해버리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리는 사태가 생긴다는 거였다.

일단은 경매 카페에서 조언한대로 디지털 녹음기를 구입했다. 이제부터는 통화내용을 모두 녹음해야 할 판이었다. 우리는 마을에 가서 마을 분들로부터 건설사가 창고에 간판을 걸었던 날짜에 대한 확인서를 받았다. 그리고 집이 원래 비어있었는데 아들이 짐을 넣겠다고 했다는 집 주인 아버지의 말씀은 녹취를 했다. 그걸 모르는 집 주인은 매일 전화를 했다. 나중에는 이사비 금액을 100만원으로 얘기하는 내게 비속어를 써가면서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법원에서는 낙찰통보서가 도착했고, 1개월안에 나머지 금액을 납부하고 등기 이전을 하라고 했다.

일단은 등기 이전이 우선이라 집의 명도는 제쳐놓고 대금을 납부하고 등기이전을 했다. 일반적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등기 이전도 조금은 복잡했지만, 어떻게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덕까지 세 번의 발걸음을 하면서 이전을 완료했다. 등기 촉탁서를 접수함과 동시에 인도 명령서를 접수했는데, 집 주인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법원의 통지를 받고 법원에 가서 탄원서 사본을 발급받았다. ‘돈이 없어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이사를 했는데, 아직도 그 집에 짐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짐을 가져다 놓을 곳이 없어 6개월후에나 비워줄 수 있다. 그러니 인도명령의 인용을 허가하지 말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6개월이면 인도명령서의 효력이 지나고 명도소송을 해야 하는 시한이 되는 거였으니, 우리들이 명도소송으로 애를 먹어보라고 낸 탄원서가 분명했다. 나는 인도명령까지의 시간 촉박때문에 그 자리에서 빈집 상태일때의 사진과 집 주인의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을 CD로 첨부하여 탄원서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다행히 법원에서는 인도명령서를 인용으로 결정해주었다. 이미 집을 낙찰 받은 지 한 달하고도 열흘이 넘게 지났고, 등기 이전까지 완료되었지만 언니네는 이사를 할 수 없었다.

공장 사택을 하루 빨리 비워주어야 하는 형편인데 집 주인의 횡포로 시간을 끌어대니, ‘괜히 경매를 했다’는 후회감이 계속 커졌다. 인도명령서가 인용되고 연달아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집행 일시도 통보받았다. 그리고 창고를 임의 점유한 건설사에 대해서 인도명령을 신청하여 정본을 수령했지만, 집 주인과 건설사 대표는 우리와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이사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인도명령과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집행하겠다는 우리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었는지 집 주인은 이사비용을 낮춰서 전화를 했다. 본채는 300만원, 창고는 200만원이 그들이 낮춘 금액이었다. 거절하자 집 주인이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끝까지 가보자. 누가 손해인지’

그 내용증명을 받은 이튿날에 언니가 전화를 했다. 집 마당에 쓸데없는 건설 자재가 가득 채워져 있어 자동차의 출입도 안 된다는 거였다. 대형 버스 8대는 족히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에 건설 폐자재가 그득한 사진을 함께 보내주었는데, 정말이지 쓸 만한 자재는 하나도 없었다. 폐 콘크리트에, 거푸집을 해체한 나무, 못 쓰는 타이어와 간판들이 마당 가득 있었다. 집 주인과 임의로 입주한 건설사가 함께 해놓은 거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전화를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500만원을 송금해주면 즉시 치우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집을 쓸 수는 없을 거라는 엄포가 돌아왔다.

‘이건 위법이다’는 내게 집 주인은 ‘도둑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경매로 남의 집을 거저먹었다는 거였다.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경매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으로 집 주인은 자신이 100% 피해자임을 계속 강조했지만, 내가 구입했던 금액은 원래 집값에 비해 아주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 집의 시세는 7000만원정도라고 했으니 말이다. 집 주인에게 시달리다 못해 ‘500만원을 건네고 깨끗이 끝낼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우리 형편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고, 이리 저리 물어봐도 줄 필요가 없는 돈이라고 했다. 결국 강제집행을 신청했다. 강제집행 결정문을 받은 집 주인은 다시 우리에게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당장 철회하라고. 앞으로 앞뒷집에 살 건데 미리부터 얼굴 붉히지 말고 좋게 해결하자’는 것이 내용증명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500만원은 일 년을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기에, 결국 나도 그들에게 내용증명을 보내야 했다. 낙찰이 끝난 집에 짐을 들여놓은 사실과 마당에 쓸데없는 폐자재를 쌓은 것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으로 작성했다. 건설사에는 ‘가짜 임대 계약서에 대한 경고’로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내용증명을 받은 집 주인이 전화를 했다. 집 안에 있는 짐을 우리가 모두 치우는 조건으로 하되, 이사비는 생각해서 좀 주면 열쇠를 넘겨주겠다는 거였다. 1개월 보름동안 집 주인의 횡포로 법원에 들락거려야 했던 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데, 기어이 ‘알아서 달라’는 식으로 이사비를 제시하는 집 주인의 배포가 궁금했다.

얼굴을 보고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100만원을 주겠다는 내게 집 주인은 이사비는 수긍하면서도 만나는 것은 거절했다. ‘무슨 아줌마가 베짱이 그리 세요?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 우리 아버지께 주세요.’ 돈을 받았다는 증명을 어떻게 할 거냐고 하니 아버지께 현금 수령 영수증을 보내놓겠다고 했다. 100만원을 전 주인(열쇠를 넘겨받았으니 전 주인이 되는 셈이었다)의 아버지께 지불하고서야 우리는 집 열쇠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집안은 엉망이었다. 쓸 수 없는 침대나 가전제품들로 가득 차 있어 남편과 형부가 거의 이틀을 치워야 했다.
가구나 가전제품은 폐기물 수거 스티커를 구입하여 처리하고, 다른 쓰레기들은 군에서 운영하는 쓰레기 매립장에 금액을 지불하고 버려야 했을 정도였다.

쓰레기를 다 치우고 나니 뒷집에 살고 있었던 전 주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렇게 해야 돈을 받는다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주워온 것들이다’고 하여 우리를 기함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살림살이는 쓰레기 수준이었다. 하지만 창고를 점유한 건설사는 창고를 비워주지 않았다. 여전히 200만원의 이사비를 요구하여, 경매카페를 통해 알아보니 애초에 없었던 것이니 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법원에 사유를 설명하고 강제집행을 요청했다. 그리고 전화를 했지만 건설사 대표는 ‘마음대로 해라. 비용이 들어도 당신들이 드는 것이니 우리는 알 바 없다’는 대답을 했다. 강제집행비용을 우리가 처리해야 하나 싶어 법원에 물어보니, 강제집행시 소요되는 금액은 집행을 당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것이라고 했다.

5월 7일, 법원의 집행관이 강제집행 계고장을 건설사 사무실에 붙였다. 계고장을 붙이기 위해 열쇠공을 따로 부르니 그것도 지불해야 했는데, 더 황당했던 일은 지난 1년간의 밀린 수도요금을 그날 군에서 받으러 온 거였다. 어떻게든 밀린 수도요금을 받기 위해 강제집행 계고일을 기다렸다는 직원들의 말로, ‘그동안 밀린 수도요금이 만만치 않겠구나’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빈 집 상태로 있어서인지 5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수도요금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군의 상하수도 조례를 보니, 상수도 요금이 밀려 있을 때는 집을 인수한 사람이 부담한다고 되었 있었다. 그걸 보니 ‘이러면 전기요금도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전기요금을 연체해 놓았는지 독촉장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한전에 전화를 했더니, 집을 새로 인수한 사람은 인수한 날로부터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4.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것이 필요한 것을

‘5월 20일까지 비워주지 않으면 강제집행 비용은 집행을 당하는 점유자가 부담한다’는 계고장 내용을 본 건설사가 전화를 해왔다. 그동안 지루한 싸움에서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비우겠단다. 단, 150만원의 이사비를 달라는 것이 조건이었다. 건설사의 대표가 전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를 알았기에 안하겠다고 했다. 건설사는 전 주인의 사촌이었다. 읍내도 아닌 한갓진 시골에 건설사가 있을 필요가 없음에도 굳이 건설사 간판을, 그것도 창고에 걸어둔 것은 순전히 낙찰자로부터 이사비를 받기 위해서일 거라는 카페 회원들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저의는 내 눈에도 확실히 보였다. 건설사는 경매가 끝나자마자 창고 열쇠를 전 주인으로부터 넘겨받아 건설사 간판을 걸고 집요하게 이사비에 매달렸다.

강제집행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건설사와는 여전히 이사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전 주인의 아버지가 전화를 해왔다. “댁들이 산 집의 안방과 화장실 일부가 그 집 땅이 아니에요. 뒷집 땅이니 내 땅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부랴부랴 전 주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했다. “실은 앞집과 뒷집을 한 번에 올렸어요. 원래 앞집(우리가 낙찰 받은 집)이 도로를 볼 때 오른쪽으로 더 가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왼쪽으로 좀 당겨서 지었지요. 어차피 앞뒷집은 한 집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지었는데, 이제는 각각의 사람이 살게 되었으니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동안 전 주인이나 건설사와 실랑이를 하면서 여러 번 후회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현지답사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시댁에 오며가며 자주 봤던 집이라고, 시댁 근처 마을에 있어서 안 봐도 안다며 그냥 응찰을 했던 것이 경매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가장 큰 문제였다.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던 집의 위치 문제를 우리만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면사무소에서 ‘건축준공허가서류’를 일일이 복사를 하면서도 이런 문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다. ‘맨 처음에 언니가 집을 보러왔을 때 만났다면서요? 그때 얘기를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하며 항변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다. “그때 가르쳐 주었다면 입찰도 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면 유찰되는데 우리 아들 빚 갚아야지 낙찰자 편의를 내가 왜 봐줍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은연중에 전 주인의 아버지를 ‘시골 노인’이라며 과소평가한 셈이었다. 또한 시골사람이니 당연히 순수할 것이고 거짓말을 한다거나 숨기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 것도 있었다. 어떤 대책을 제의해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방과 화장실 일부를 털어내야 할 지경이 되니 말이다. 전 주인의 아버지는 ‘그냥 건설사 사장한테 150만원을 준다면 화장실과 안방을 허물어내지 않고 쓰도록 해줄게요.’하며 창고 이사비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판단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괜찮은 제안이네’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얼토당토않은 제안이었다. 150만원에 대한 문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계약으로 성립되는 일도 아니었으며, 만약 뒷집의 주인이 바뀐다면 허공에 날아가는 약속이 되기 때문이었다.

경매 카페에서는 의견이 중구난방이라 법률카페에 이 부분에 대한 상담을 해보았다. 답변은 ‘점유한 뒷집 땅만큼을 매수’하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니 등기관계등 복잡한 일이 많아, 전 주인 아버지의 말씀대로 150만원의 이사비를 지불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법원에 볼일을 보러 다니면서 보게 된 법률구조관리공단에 상담을 신청했다. 법률구조담당관은 ‘일단 뒷집 어르신의 말씀이 진짜인지 측량을 해보세요’하면서 측량을 해보기를 권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적공사에 전화를 하여 측량 신청을 하고 대금을 납부했다.

측량일은 5월 26일로 잡혔고, 강제집행일은 5월 21일이었다. 측량을 하고 집의 경계를 확실히 한 다음에 강제집행을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다시 집행일을 잡게 되면 언니네의 이사가 점점 미뤄질 것 같아 집행일을 미루지 않고 기다렸다. 그동안 건설사와 전 주인의 아버지는 줄기차게 이사비를 달라는 전화를 했지만, ‘측량 신청도 해두었고 집행일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냥 기다려달라’는 말로만 대답을 하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건설사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마당에 가져다놓은 폐자재의 철거와 건설사 간판을 떼고 창고 열쇠를 넘겨주지 않으면, ‘허위 임대 계약서 작성’과 ‘무단 점유’에 대한 처분을 확실히 하겠다는 쪽으로 작성을 했다.

내용증명이 도달한 것을 인터넷의 등기조회로 열람하고 있는데, 건설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당의 폐자재 철거와 건설사 간판을 뗄 것이며, 창고에 들여놓은 소파와 2개의 책상도 철수하겠다는 거였다. 단 창고 열쇠는 줄 수 없으니 열쇠공을 부르던 말던 알아서 하라는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두 시간을 달려 건설사 대표를 만났다. 열쇠를 줄 수 없다는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다. “열쇠공을 불러서 새로 열쇠를 달면 5만원은 할 겁니다. 그 정도는 손해 봐도 되잖아요?” 한 마디로 ‘소액이나마 당신들이 지출해봐라’는 베짱이었다. 결국‘19일까지 비워준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고 열쇠는 필요 없다는 말로 창고는 비워졌고 법원의 마지막 업무가 될 강제집행 취하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창고가 비워지자마자 열쇠업자에게 요청하여 창고의 열쇠를 바꾸고, 한전에 전기 계량기의 숫자를 사진으로 찍어 전송해주고 전기 가입자를 모두 변경했다. 그제야 온전히 우리 집이 된 셈이었지만, 하나의 과제가 더 남아있었다. 바로 측량이었다. 측량 결과는 전 주인의 부친 말씀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뒷집의 진입로가 현재로는 없는 거였다. 뒷집의 진입로가 되는 폭 3m의 땅이 우리집 옆의 밭주인이 쓰고 있었다. 밭은 우리 집의 마당보다 2미터가 넘게 낮은 지내여서, 뒷집의 주인(전 주인의 부친)이 그 땅을 길로 쓰려면 1,00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땅을 메워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우리 집이 된 마당을 경유하지 않으면 뒷집은 출입을 할 수 없는 맹지가 되는 셈이었다. 나는 단순하게도 ‘화장실과 안방을 그냥 쓰는 대신, 앞마당을 통과해서 다녀도 좋다는 맞바꾸식 조건’을 제시하면 문제가 해결될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안된단다. 지난 10년간 뒷집이 통로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마당출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우리집이 차지한 뒷집의 땅에 대한 해결을 하는 것만이 남았다. 뒷집에서는 ‘그것보라’는 식으로 베짱 좋게 우리 집 마당에 각종 농기계를 여기저기 가져다 놓았다. 언니네가 이사를 하던 날에도, 뒷집의 농기계 때문에 이삿짐차가 진입하는 일에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앞뒷집에서 살아야 해서 언성을 높일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뒷집에서도 더 이상 화장실과 안방 땅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5.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언니네가 이사를 하고 4개월이 지났을 때, 뒷집의 전화를 받았다. 뒷집을 좀 사면 안 되겠냐는 전화였다.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니, 뒷집도 경매로 나오게 된 거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경매로 나왔던 집이라 뒷집은 이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안방과 화장실 땅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150만원’이라고 했던 일이 다시 생각나 화가 났지만, ‘집을 잃는 사람의 심정’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생각해보겠다는 대답만을 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언니에게 뒷집에 한 번 가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행히 뒷집에서는 언니에게 집을 보여주었고, 언니는 ‘날림으로 지은 집이지만 수리만 잘 하면 살기에 좋은 집’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우리는 뒷집을 다른 사람이 구입할 때의 상황을 예견해보았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안방과 화장실이 점유한 땅 문제가 다시 대두될 것은 뻔했다. 결국 남편과 의논 끝에 뒷집의 경매에 입찰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1차부터 입찰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뒷집은 누가 봐도 맹지였기에 입찰자가 없어 1차에서 유찰이 되었다. 맹지여서 2차 3차로 가도 유찰이 될 것은 뻔했다. 나는 3차쯤에 입찰을 해서 조금이라도 싼 값에 경매를 받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친정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엄마는 펄쩍 뛰셨다. “그 집의 시세에서 조금 아래로만 입찰해라. 남의 불행을 너무 싸게 내 행복으로 바꾸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당시 그 집의 시세는 마을사람들의 말로는 2500만원 정도라고 했다. 앞집과 달리 면적이 크지 않은데다가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던 거였다. 나는 2차에서 2300만원을 써넣어 단독 입찰로 낙찰을 받았다. 두 번째 경매라 그리 떨리지도 않아 처음과는 달리 덤덤한 기분으로 여유까지 느끼며 입찰을 했었다. 역시 경험은 가장 좋은 스승이 된 셈이었다. 낙찰을 받자마자 뒷집에 찾아가서 이사비를 의논했다. 앞집을 낙찰받고 이사비 얘기를 미리 하지 않았다가 곤욕을 치른 것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먼저 말을 꺼내버렸다. “이사비를 얼마 정도 드릴까요?” 뒷집의 주인은 ‘3차 4차까지 가도 되는데 2차에서 받아줘서 너무 고맙다. 바로 옆 동네로 이사를 할 거니까 150만원을 주면 좋겠다’며 요청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150만원을 이체시켜드리고 이사확인서를 받았다.

앞집의 명도에 비하면 너무도 싱겁게 끝나버려, 그냥 일반적인 매매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졸지에 우리는 도시의 아파트를 포함하여 3채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돈으로 따지면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뒷집의 등기를 이전할 수 있었다. 뒷집이 이사를 하던 날에는 우리 부부도 함께 이사를 도와 드렸다. 그리고 뒷집 노부부의 화장품과 생활용품(휴지와 세제)을 우리 형편에 맞춰 챙겨드렸다. 처음 시작은 이사비 문제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끝은 좋았던 헤어짐이었다. 앞집을 명도 받을 동안 나와 언성을 높였던 아들과도 웃으며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요즘도 읍내의 오일장에 가면 가끔씩 만나 칼국수를 함께 먹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역시 세상은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다.

6. 경험의 대가를 위하여

2008년에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2채의 농촌 주택을 구입했던 우리는 지난해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경매로 집을 구입한 후 3년간은 2채의 집을 사기 위해 대출했던 빚을 상환했고, 그 이후로는 열심히 돈을 모았다. 물론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바닷가가 고향인 남편이 어부일을 하는데 필요한 어선을 구입할 금액은 되었다. 도시의 아파트를 매도한 돈은 만약을 위해서 저축을 해두었다. 내가 신장이식을 해야 할 경우까지 가게 되면 병원비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사회복지적 지원도 많다고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내 병은 우리 힘으로 다스리며 살아가고 싶어 이 돈을 절대로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꽉꽉 묶어둔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들어가니 될 수 있으면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뒷집을 직접 리모델링했다. 앞집은 언니네가 이사를 오면서 리모델링할 금액을 우리가 지불하고 건축일을 하는 형부가 직접 고쳤기에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었다. 대신 뒷집은 남편과 함께 둘이서 우리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리모델링을 시도했다.

우리가 이사를 들어오면서 언니네가 건축일이 많은 도시로 전세를 구해 이사를 가버려 형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경매에서 얻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생전 처음 집수리를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인터넷의 집수리 카페에 질문을 올려 답글을 받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방법을 찾아냈다. 수리 자재도 인터넷으로 일일이 구매를 하며, 난방비의 부담을 덜기 위해 시골 실정에 맞게 군불을 넣는 황토방도 만들었다. 언니네가 살던 앞집에서 임시로 기거하며 한달간의 수리 끝에 뒷집은 깔끔하고 단열이 잘 되는 집으로 변신을 했다. 그 덕분인지 요즘 내 건강도 도시에 살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고, 남편도 바다일에 손이 익어 마을일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어부가 되었다.

그리고 앞집은 현재 마을의 사랑방이 되어있다. 언니네가 방으로 꾸몄던 칸막이를 제거하니 식당을 했던 곳이라 160㎡에 달하는 넓은 거실이 완성되어 웬만한 모임은 치를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남편은 자신이 맡은 선주협회나 청년회의 회의도 하고 함께 즐기는 장소로도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분위기좋은 집이 되었다. 집에 손님이 많이 찾아오면 잘 된다는 속설처럼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로 즐거운 일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경매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경험을 갖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하는 것이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이 된다.’는 거였다. 그 경험덕분에 우리는 직접 담장을 쌓기도 하고, 군불을 넣는 부엌을 만들 수도 있었다. 도시에 있었더라면 ‘그냥 사람 불러서 하지’하던 것도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고치고 만들고 하는 것이 일상처럼 된 셈이다. 이렇게 직접 움직이니 시골에서는 슈퍼맨이 된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아니라, 돈을 아낄 줄 아는 슈퍼맨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바다 고기 몇 마리 잡아서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것을 돌아보면 도시에 살 때보다 더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시간적으로도 여유를 누릴 수 있고, 금전적인 여유도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내 땅이 있다!’는 포만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번도 내 땅이 없었던 우리 부부에게 1200㎡에 달하는 2채의 대지는 벼락부자같은 느낌으로, 즐거운 포만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이다.

물론 마당안에 있는 텃밭의 채소가 주는 물질적 포만감도 함께 있으니, ‘부자가 따로 있나? 이렇게 사는 것이 최고이지!’ 하는 만족감으로 더 없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2채의 집을 구입하여 지불한 금액은 리모델링 비용까지 총 7500만원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지금 우리 집의 시세는 우리가 지출했던 것보다 4배가 넘게 올랐다고 한다. 물론 지난 2010년 이후로 이 지역의 땅값이 전반적으로 많이 오르기도 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앞의 도로가 확장되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집 앞을 경유하면 동해에 접한 바다로 갈 수 있는데, 이 해변에 대규모 위락 시설이 들어올 것이기에 이곳의 땅값이 많이 오른 덕분이었다.

거기에다가 이 도로에서 식당 허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집이 앞집밖에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된다고 한다. 작년에 뒷집의 새 단장이 끝나 이사를 온 직후에, 앞집이 필요 없다 싶어 철거를 하려고 면사무소에 신청 서류를 가지러 갔더니 담당 직원이 펄쩍 뛰는 것이었다. “그곳이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더 이상 식당 허가가 안나요. 그 집외에는요. 그러니 집을 잘 관리하세요.”

우리부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축 외에는 돈을 불려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내 집이었던 도시의 아파트도 우리가 샀던 금액 그대로 매도를 했으니, 저축을 한 것 외에는 쉬운 재테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동산 투자로 00를 벌었다.’고 하면, 부러워하기만 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냥 저축만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는 낙담도 가끔 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구입한 집이 이렇게 시세가 오를 줄은 몰랐다.

친정엄마께 이런 얘기를 말씀드렸더니 엄마는 ‘뒷집에 입찰할 때 순한 마음으로 해서 그렇지. 앞으로도 순하게 살면 이런 일이 더 있을 거야’ 하며 칭찬을 해주셨다. 어찌 보면 엄마의 말씀이 맞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돈을 쫓아가면 안 되고, 돈이 사람을 쫓아야만 된다’고 말하는데, 같은 맥락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이사비 문제’로 안달복달했던 앞집의 일이 떠오르면 ‘조금 더 부드럽게 대처할 걸’하는 후회를 할 때도 있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은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과 의견충돌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려 노력하며 건강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니, 후회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마음이 푸근한 부자가 되는데도 일조를 한 경매의 경험을 살려,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기도 한 셈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본 경매, 우리에게는 행복한 경제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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