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방동네 서러운 골목 피어서 온기된'반디꽃'

머니투데이 이경숙 기자 2014.12.20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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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머니, 이웃집 산타]<3>반디교실 사람들과 ‘제국시대’ 이야기

편집자주 해마다 성탄절이면 아이들이 기다리는 존재, 산타. 정말 산타가 있을까? 장난감, 과자 따위 안겨 주는 가짜 수염 붙인 산타가 아니라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산타가 진짜 산타라면, 그 산타는 우리 이웃에 산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직업으로 살지만 힘들고 외로운 이웃을 보듬는 우리 이웃집의 진짜 산타들을 찾아 소개한다.

반디교실과 반디마을도서관이 자리 잡은 고양시 토당로 78번길. 점포들이 문을 닫아 대낮인데도 인적이 드물다./사진=이경숙 기자반디교실과 반디마을도서관이 자리 잡은 고양시 토당로 78번길. 점포들이 문을 닫아 대낮인데도 인적이 드물다./사진=이경숙 기자


눈알이 시리긴 처음이었다. 바람도 찼지만 풍경도 찼다. 고양시 토당로 78번길에 간판을 내건 상점 중 절반은 알루미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약국, 미용실, 옷가게, 슈퍼마켓 모두 문을 닫았다. 16일 화요일 오후 세시, 큰 길의 상점은 다들 문 열고 영업하던 시간이었다.

이 길에 공부방이 있느냐, 다른 길 아니냐, 묻고 싶었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상가 건물 1층에 붙은 '반디마을도서관' 표지가 보였다. 문을 열자, 온기가 밀려왔다. 반디 하나 같이 미약했지만 언 몸에는 충분히 따뜻한 기운이었다.



뒤이어 “선생님~” 하며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벌컥 문을 열었다. 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49)은 “잠깐만요” 하더니 아이 먼저 챙겼다. 아이는 자원봉사증 받는 방법을 이 관장한테 물었다. 그 아이도 비정하게 추운 길을 지나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 관장은 “요 옆 반디교실에 다니는 아이”라고 했다. 한 게임회사가 이메일로 “운영이 어려우니 기사로 알려 달라”며 제보했던 지역아동센터가 바로 반디교실이다. 이 관장은 자신이 2004년 설립한 반디교실을 떠나 지난 7월 반디마을도서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서관장이 더 좋은 자리라서? 그는 피식 웃었다.



“저는 월급이 없어요.”

월급 없는 일자리로 가길 자임한 이 관장과 그를 도와달라며 이메일을 보낸 게임회사 이야기는 길지 않다. 결론부터 한 마디로 줄이자면, 사람을 귀하게 만드는 건 돈이나 재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더라는 것.

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

◇아침 굶고 다녀도 배 볼록했던 아이들

십년 전에도 이 동네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집 나간 며느리도 많았다.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들은 그나마 입성이라도 깨끗했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키우는 아이들은 한 겨울에도 꼬질꼬질한 태권도복을 내복도 없이 입고 뛰어다니기 일쑤였다.

돌봐주는 어른이 없는 아이들은 몸매부터 달랐다.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얼굴이 퉁퉁했다. 그런 아이들은 아침 굶고 나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은 건너뛰었다가 밤늦게 자기네끼리 배 터지게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이 관장이 보다 못해 아이들을 불러다 저녁마다 밥을 해먹이기 시작한 건 2003년, 18평짜리 연립주택을 얻어 저소득층이거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더 모은 건 2004년이었다.

처음엔 정부 지원 전혀 없이 무료로 운영했다. 이 집 쌀독에선 쌀 퍼오고 저 집 냉장고에선 콩나물 꺼내와 저녁을 지었다. 동네에서 영어 좀 아는 사람은 영어 가르치고, 미술 좀 하는 사람은 미술을 가르쳤다.

반디교실 아이들이 텃밭을 가꾸며 자연을 배우고 있다./사진제공=반디교실반디교실 아이들이 텃밭을 가꾸며 자연을 배우고 있다./사진제공=반디교실
◇소득, 연령 상관없이 모이니 우울, 편식도 극복

그 후 십년, 반디교실은 42평 상가 2층에서 35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규모로 커졌다. 그중 여덟아홉은 부모가 같이 살고 소득도 평균적인 집 아이들이다. 반디교실 교육프로그램이 좋다는 소문에 여염집 부모도 아이들을 보냈다. 지역아동센터는 저소득층 대상이어도 정원 30%까지 일반가정 아이들을 받을 수 있다.

우리 풀과 새를 가르치는 사시사철 자연학교,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까지 낸 애니메이션 수업, 오카리나부터 전래놀이, 중국어 수업까지 반디교실 프로그램은 사교육 학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생까지 섞여 있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어울리며 우울이나 이기심을 이겨내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친환경 식단으로 함께 밥을 먹으며 편식 습관도 고쳤다.

이 관장은 알코올 중독 할아버지가 키우던 남매 이야기를 들려줬다.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때 처음 온 남매는 오자마자 탁자 아래에 숨었다. 작은 일에도 울고, 달래도 울었다. 탁자 밑에서 나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에 1년이 걸렸다. 폭식으로 뚱뚱했던 여동생은 늘씬하게 컸고, 편식으로 말랐던 오빠는 보기 좋게 살이 붙었다.

자기 똑똑한 것만 알아달라던 남자아이도 있었다. 머리가 좋아 뭐든 보면 외웠다. 자기가 남보다 상을 먼저 받지 못하면 울었다. 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싸우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교사들은 글쓰기를 통해 아이가 자기를 솔직하게 표현하게 했고, 문제가 보였을 때 바로 상담했다. 요즘 이 아이는 친구들과 잘 지낸다.

게임회사 포플랫과 '제국시대' 게임유저들이 기부한 돈으로 바꾼 새 책상(왼쪽)과 컴퓨터. 이들이 3년 동안 후원한 돈으로 벽지, 의자, 캐비닛 등 집기가 교체됐다.게임회사 포플랫과 '제국시대' 게임유저들이 기부한 돈으로 바꾼 새 책상(왼쪽)과 컴퓨터. 이들이 3년 동안 후원한 돈으로 벽지, 의자, 캐비닛 등 집기가 교체됐다.
◇글로 이어진 작은 후원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 관장은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지역아동센터 소식지, 반디교실 인터넷카페(http://cafe.daum.net/bandischool)에 올렸다. 이 사연을 본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금을 보냈다.

최근엔 오래돼 부서질 것 같던 책상 하나와 낡은 컴퓨터가 교체됐다. 이메일로 이 곳 사연을 제보했던 게임회사 ㈜포플랫과 이 회사 게임인 ‘제국시대’ 애호가들이 보낸 기부금 덕분이었다. 이 회사와 ‘제국시대’ 게임유저들은 3년째 반디교실을 후원하고 있다. 그동안 낡은 벽지, 의자, 캐비닛, 청소기도 새것이 됐다.

이 관장은 SBS기술팀, 일산열병합발전소, GS코퍼레이션, 고양올레 등 장기 후원자들 이름을 하나씩 대며 이 분들과 시 지원 덕분에 반디교실 기본 운영은 해결된다고 말했다.

현재 반디교실 운영책임자는 노정원 센터장(사회복지사)이다. 그 역시 초창기 반디교실을 함께 키웠던 이다. 그래도 설립자 마음에는 내가 키운 내 집 같은 공간일 터. 이 관장이 반디교실을 떠나 공과금 낼 돈도 마뜩찮은 마을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뭘까?

노정원 반디교실 센터장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다가 딸의 그림을 보며 웃고 있다. 노 센터장의 딸도 반디교실에 다닌다.노정원 반디교실 센터장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다가 딸의 그림을 보며 웃고 있다. 노 센터장의 딸도 반디교실에 다닌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에 필요한 '온 마을'이란

“이 골목에 이런 공간이 없어요. 재개발될 예정이라고 점포들은 문을 닫았고 술집, 점집, 여관 이런 집만 문을 열어요. 그런데 도서관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오가다 들어와서 정말 좋은 책이 많네, 해요. 아이들뿐 아니라 주민들이 편하게 들어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여기서 다시 마을공동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이 저녁 시간에 반디교실 급식을 돕고 있다.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이 저녁 시간에 반디교실 급식을 돕고 있다.
이 관장은 홀로 된 시어머니 모시고 두 아이, 비정부단체 일하는 남편과 함께 옥탑방 월세로 산다고 했다. 월급 없는 도서관 운영을 맡은 이유가 이것뿐일까, 다시 물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일화 하나를 더 들려줬다.

지난해 반디교실을 운영하는 고양여성회 주최로 도서관에서 ‘할머니 육아교실’을 열었을 때 일이다. 손자손녀를 직접 키우는 할머니 12명이 모였다. 미술치료 검사지를 작성하라며 연필을 나눠줬는데, 한 할머니가 울음을 터트렸다. “내 평생 처음으로 연필을 잡아봤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기는커녕 학교 문턱도 넘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어렵게 키운 자식들이 결혼생활 원만치 못하게 살다 이혼하고, 늙은 나이에 손녀손자까지 맡아 키우다 보니, 위축되어 우울하게 사시다가, 생전 처음으로 뭔가를 배운다는 게 좋으셨던 거예요.”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어느 밤 이 관장을 찾아와 꼬깃꼬깃한 봉투를 쥐어주며 “이 늙은이 세 손녀를 이 사람이 다 키웠어”라고 했다던 할머니야말로 그 말의 진짜 뜻을 알 것이다. 어른 한 명이 제대로 사는 데에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게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게 게임입니다"

이메일로 반디교실 이야기를 알려달라고 부탁한 이는 (주)포플랫이라는 게임회사의 강재호 대표이사와 김종형 이사였다.

2012년 7월 '신무림대전'이라는 역할수행게임(RPG)을 운영하던 이들은 가상현실 속 게임인데도 유저들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을 보고 이 분위기를 가라앉힐 이벤트를 궁리했다. 승리한 문파(길드)과 태상(길드마스터) 이름으로 회사가 대신 기부해주는 이벤트였다.

이벤트 공지 후 회사는 어디 기부할지 유저들 의견을 물었다. 독거노인을 돕자, 에어컨 못 켠다는 공부방을 돕자 등등 댓글 토론이 벌어졌다. 결론은 저소득층 지역아동센터 돕기.

그래서 김 이사가 발굴한 것이 반디교실이었다. 그는 한 소식지에서 우연히 이은영 당시 반디교실 센터장이 기고한 '반디 할머니'라는 시를 읽고 이곳 사연을 유저들한테 알렸다. 이렇게 시작된 반디교실 후원은 '제국시대' 유저들까지 3년째 이어졌다.

기부로 달라진 건 반디교실뿐만이 아니었다. 게임유저들 사이의 문화가 달라졌다. 제국시대 길드 중의 하나인 '폭풍'의 유저 '폭풍기파리'는 "함께 기부할 루비를 모으고 기부처를 논의하고 오프라인에서 만나 경조사를 챙기기도 한다"며 "제국시대는 전쟁게임이라기보다는 스포츠경기를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다른 전쟁게임은 채팅창에서 욕설이 오가거나 언쟁이 치열하기 붙곤 한다. 그런데 제국시대 유저들은 마치 축구선수들처럼 전략적으로 싸우고 게임이 끝나면 서로 '수고하셨습니다'하고 인사를 나누는 게 문화라고 '기파리'는 전했다.

강 대표는 "우리가 우리 고객들 대신 하는 기부는 매출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며 "사회공헌이라기 보다는 그냥 사람이니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게 게임"이라며 "전쟁게임을 하면서 치고 박고 싸우지만 핸드폰 게임화면 뒤에 있는 건 사람이라는 걸 이벤트를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주)포플랫은 역할수행게임 '제국시대' 유저들과 함께 3년 동안 반디교실을 후원했다. 왼쪽부터 김종형 이사, 전민혁 씨, 강재호 대표이사.(주)포플랫은 역할수행게임 '제국시대' 유저들과 함께 3년 동안 반디교실을 후원했다. 왼쪽부터 김종형 이사, 전민혁 씨, 강재호 대표이사.
반디 할머니
- 이은영 반디마을도서관장이 2010년 지역아동센터 소식지에 기고한 시

반디교실이 처음 문 열었을 때 만났으니
할머니와 인연을 맺은 지 8년째 되었지요.
장애를 가진 아들과 세 손녀를 건사하며
칠십이 훌쩍 넘은 연세 몸 성한데 없고
머리엔 하얗게 세월의 눈보라 성성한데
낡은 유모차에 김치며 콩나물 무침, 오뎅볶음
조물조물 만들어 가져오시곤 했지요.
살아가는 얘기, 묻어뒀던 아픈 얘기 하시며
제 손잡고 눈물도 많이 보이시곤 했지요.

기초수급자지원금 쪼개 쓰시면서도
내 신어보니 편하더라시며 운동화 사오시고
때때로 쌀이며 옷이며 건네시는 할머니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시려는 분
큰 손녀딸 5학년 때 둘째는 4학년, 막내는
그 다음해 반디교실에 입학을 했으니
세 손녀가 모두 반디교실의 식구들이고
할머니도 반디의 식구나 다름없지요.

몸이 불편하시니 일부러 후원의 밤
말씀 안 드리고 있었는데 바로 당일에
아시고 집으로 불쑥 찾아오셔서는
후원금이라며 꼬깃꼬깃 봉투 내미시고
제 손을 꼭 잡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더 많이 도와줬어야 하는데...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 집도 없는 사람이 어린 것들 거둬다가
밥 해멕이고 공부 갈쳐주고 좋은데 데려가고
감자 다 시들어 쭈그러진 거 깎아서는
감자국 끓여주는 거 보고 내 눈물이 났소.
좁아터진 방 얻어서 애들에게 지극정성
이 늙은이 세 손녀딸을 이 사람이 다 키웠어.

말씀하시는데 꼭 마이크를 잡으신 분처럼
목소리도 힘 있게 눈에 힘주며 말씀하시는
후원의 밤 행사날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어느 후원보다 더 뜨겁고 깊은 후원이고
있는 사람이 내는 그 어떤 돈보다 더 값지며
말 잘하는 그 누구의 연설보다 더 감동적인
할머니 말씀에 힘이 납니다.

8년이 되도록 낮은 지붕에서 함께 살아온
서민의 벗, 반디가족이 무리로 밝히는 빛
새 세상을 열어가는 감동의 빛을 봅니다.

꼬방동네 서러운 골목 피어서 온기된'반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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