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론의 압박에 괴로워하던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결말부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노론의 공세가 부른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는 조선 후기 노론의 장기집권을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하는 최근의 역사이야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약방의 감초도 아니고 하도 우려먹어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데는 뒤주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참극에 대해 ‘합리적 의심’의 화살을 겨눠야 할 지점도 바로 뒤주다. 전근대사회에서 죄인을 극형에 처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뒤주에 가둬 죽이는 형벌은 금시초문이다. 형벌도 법도와 전례를 따졌던 조선에서 영조는 왜 듣도 보도 못한 뒤주를 대령하라고 했을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추론이야 말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은 노론계 친정을 옹호하려는 혜경궁의 의도가 묻어 있다. 이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전부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적어도 불가해한 현상을 미신에 기대 이해하려던 당시의 믿음을 엿볼 수는 있다. 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귀신에 대한 언급은 문제의 처분이 내려진 그날을 담은 실록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여러 신하들도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 1762년 윤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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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정성왕후의 말을 들었다며 사도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한다. 임금이 귀신 운운하는 것은 유교국가 조선에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격했고 유가에서는 이를 철칙으로 여겼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궐 깊숙한 곳에서는 귀신을 쫓는 ‘나례의식’이 행해졌고 민간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이와 같은 단서들을 취합해보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광기를 귀신의 짓으로 규정하고 뒤주를 대령케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뒤주의 재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게 회화나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악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평소 귀를 씻어 액운을 떠넘기고 귀신을 입에 담는 영조라면 세자를 뒤주에 가둬 귀신을 쫓으려 했을 수도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이런 의식은 때때로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비천한 무수리 출신인 탓에 어려서부터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왕세제 시절 경종 독살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왕권도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극심한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이에게 미신에 기대는 ‘샤먼군주’의 얼굴이 어른거린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다.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일물(一物)’, 즉 뒤주에 대한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지금도 사도세자의 뒤주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