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단상] [명사칼럼] 신해철, 마왕 혹은 개인주의자

머니투데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2014.10.3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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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뮤지션의 갑작스런 죽음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참 여러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원조 아이돌 가수로, 누군가는 그를 경계를 넘나드는 로커로 기억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를 소신 있는 소셜테이너로, 누군가는 그를 돌출행동을 일삼는 중2병 환자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를 한 명의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로 기억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한 말은 의외로 소박한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마지막 방송출연에서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남겼다. 그리고 1991년 그가 자기 음악세계를 최초로 명확히 한 앨범 ‘마이셀프’(Myself) 수록곡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라고 물으며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라는 불안함도 솔직히 드러냈다. 그리고 신보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23년간 그는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는 사회에서 남과 다른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보다 자신이 만족하는 행복에 천착했다.



사실 그의 청춘기에 ‘개인’은 희귀했다. ‘국민’, ‘민족’, ‘민중’은 넘쳐났지만 말이다. 그가 말하는 개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도, 역사의 필연인 혁명을 이뤄낼 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나지도, 신의 뜻을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창조되지도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개인은 ‘근대적 인간’이다. 그의 말을 빌면 ‘유전자 전달이라는 목적은 태어남 자체로 이루었으니 인생은 보너스 게임, 산책하러 나온 거다’. 이런 개인주의는 누군가에게는 ‘종북, 좌빨’보다 더 불온한 것일 게다.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그 무엇보다 집단주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청년기, 독재에 대항한다는 학생운동의 주류 역시 ‘의장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자’는 수준의 또 다른 전체주의였다. 그 투사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후배들에게 직장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꼰대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교, 직업, 외모, 사는 동네, 차종,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문화, 입신양명이 최고의 효도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가치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집단주의 문화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실증적 연구 결과 문화에 따른 국가별 행복도는 극심한 대조를 이룬다. 북유럽, 서유럽, 북미의 행복도가 높은 데 비하여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행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낮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을 개인주의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로 분석한다. 그는 공교롭게도 이 두 문화권을 비교하는 ‘비정상회담’에 출연하여 행복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게 그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만연한 개인주의로 인한 문제가 심각한데 무슨 헛소리냐고? 그건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겠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쉽게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 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 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동성동본 금혼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노래하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를 주장한 그의 행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최소한 유럽에서라면 하품이 나올 정도의 상식일 뿐이다. 그가 무슨 대단한 사상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가 뒤늦게 태동하던 민주화 이후 시대에 누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튈까봐 하지 않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거침 없이 내뱉는 솔직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술적으로는 IT 강국이고 정치제도적인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근대 자유주의조차 체화하지 못한 문화 지체의 시대에 그 같은 사람은 끊임 없이 시대와의 불화를 낳는다.

그와 이 시대를 함께 살아 온 이들은 그의 분노와 좌절을 이해하면서도 이미 기성 사회의 일원이 된 입장에서 이를 고집스레 거부한 채 늙어가는 그를 불편해하며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한 때의 마왕은 별종으로 희화화되어 소비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애도 뒤에는 죄책감이 묻어 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나 호들갑스러운 상찬은 심술궂던 그가 반길 조사(弔辭)는 아닐 것이다.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그가 믿을지 모르는 천국에서의 명복을 빌기보다 “당신의 아들이어도 좋고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다시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만, 만일 내가 택할 수 있는 게 주어지고 우리가 윤회를 통해 다시 다음 생에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고, 다시 한 번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유언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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