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와 백성의 밥그릇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4.10.1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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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14. 박문수 : 영조의 치세 빛낸 재난관리 달인

어사 박문수와 백성의 밥그릇


“아! 영성(靈城 : 박문수의 봉호)이 나를 섬긴 것이 벌써 33년이다. 예로부터 군신 간에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1756년 박문수(朴文秀)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그를 이와 같이 회고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유대감이 있었다. 탕평책, 균역법 등 영조의 치세를 대표하는 업적들은 박문수의 활약으로 빛을 발하였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박문수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극중에서 그는 배배 꼬인 궁중 미스터리의 한복판에 서 있다. 당시 박문수가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감안하여 극적 상상력을 덧입히고 각색한 것이다.

그동안 사극에서 그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그려져 왔다.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요,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였다. 그의 암행어사 이미지는 설화로 구전되며 형성되었다. 설화 속 박문수는 탐관오리의 비리를 밝히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선판 히어로’였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다. 박문수는 사실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없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말 그대로 은밀히 지방관을 감찰하고 민심을 살피는 직책이다. 그런데 <영조실록>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소임은 ‘별견어사(別遣御史)’였다. 어사는 어사지만 은밀하지 않았다. 특별임무를 띄고 공개적으로 파견된 것이다.

박문수는 ‘실무에 두루 통달했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유능했다. 그는 대사간, 도승지, 병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일에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날 때마다 박문수는 재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1727년 영남안집어사, 1731년 호서감진어사, 1741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네 차례나 별견어사를 맡아 기아에 처한 백성을 구휼했다.

민심을 수습하는 데 있어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밥이었다. 백성에겐 밥이 하늘이다. 함경도의 식량이 모자라면 경상도에서 실어왔다. 환곡을 정비하고 토지측량을 다시 했다. 백성을 굶기는 탐관오리는 임금에게 처벌을 요청했다. 소임을 마친 후에도 왕래하면서 구휼이 잘 이뤄지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쌓은 현장경험은 세정개혁으로 이어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된 박문수는 ‘양역(良役)’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18세기 중반 양인 장정(16~60세)들은 군역 등의 부역의무를 짊어졌는데 이를 면하려면 두 필의 군포를 내야 했다. 그 폐단은 심각했다. 친척(족징)이나 이웃(인징)에게 걷는 것도 모자라, 어린 아이를 군적에 올리고(황구첨정), 죽은 사람까지 군포를 부과했다(백골징포).

박문수의 개혁안은 불필요한 관직과 군병을 줄이고, 어염세 등의 세원을 확보해 두 필의 군포를 혁파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의 머릿수에 맞춰 부과해온 양역을 가구나 토지 단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1750년 그는 임금을 모시고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아갔다. 유생과 평민들을 모아 놓고 양역 개혁안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이 안은 양반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관직을 줄이는 것도 불만인데, 감히 양반에게 세금을 걷겠다니! 그들은 백성을 위해 특혜를 양보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국 영조는 대안으로 균일하게 군포 한 필을 부과하는 균역법을 채택했다.

박문수는 소론의 당인으로서 노론에 둘러싸인 임금의 신임을 얻었고, 심지어 같은 소론 계열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영조의 총신답게 ‘탕탕평평(蕩蕩平平 : 치우침 없이)’ 백성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그가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한 것은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 세월 각인된 결과다. 박문수가 실제로 암행어사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거기 투영된 민초들의 한과 열망이 진짜배기다. 백성의 밥그릇을 빼앗으면 천벌 받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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