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가 맞았다

머니투데이 유병률 이창명 한정수 이재원 기자, 편집=박은수기자 2014.08.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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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대한민국 리포트] <5> 아이들 영어만큼은 나라가 책임져라

편집자주 [新대한민국 리포트]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바로 알고, 문제점도 파내고,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 3년에 5000만원 넘는 '영어 유치원' 해마다 급증
- 1주일 3시간 초등학교 영어수업은 '쉬어가는 시간'

- 회화 유창한 유학파 A군 "한국와서 문법학원 등록"
- 학교만 다녀도 '영어 만만하게' 공교육이 바뀌어야


2008년 1월 이명박정부 인수위원장이었던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의 말 한마디는 전국을 들쑤셔놓았다. "미국 가서 오렌지라고 했더니 못 알아듣더라. '어륀지'라고 하니 알아듣더라. 영어표기법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인의) 발음 변화는 어렵다."



그의 발언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그렇다면 바나나는 '버내너', 토마토는 '터메이러'로 표기해야 하나?" "변방 콤플렉스다" "딱 압구정동 있는 집 부인의 언행 수준이다" 등등. 당연히 '다른 과목까지 영어로 가르친다'는 영어 몰입교육 추진도 쏙 들어갔다. 덩달아 영어공교육 개선에 대한 다른 논의들도 물거품이 됐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이 전 총장의 '어륀지'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느 정도 영어는 할 수 있도록 하자', '영어를 꼭 점수로 줄 세워야 하나'는 등의 의미 있는 논의까지 힘을 잃었다. 보수언론은 사교육업계와의 이해관계 때문에, 진보언론은 MB정부였기 때문에 논의에 비판적이었다."



2014년 현재, 대여섯 살 때부터 온갖 이름의 영어 학원 셔틀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 엄연한 사교육 현실이다. 반대로 정부는 초등학교 1~2학년에 대해 영어수업을 금지하고,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사립초등학교와는 법적인 다툼까지 벌이고 있다.

영어 조기교육을 오롯이 사교육에 의지해야하는 것이 어차피 현실이라면, 차라리 공교육이 '어륀지'를 다시 꺼내들고 영어 사교육 광풍에 맞서는 것은 어떻겠는가. 영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가 만만해지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영유'냐 '한유'냐로 아이들 인생이 갈린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주부 김모(33)씨는 작년부터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만5세가 된 딸아이를 영유(영어유치원)에 입학시켰기 때문이다. 막상 영유에 보내고 보니 가정경제가 휘청했다. 120만원 학원비에다 원복, 교재비, 방과 후 프로그램 한두 가지 합치니 한 달에 150만원이 넘는다. '내 형편에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영어유치원에 보낸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아이는 곧잘 영어로 말 하고, 영어 애니메이션을 거의 다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영어연금 들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3년이면 5,000만원이 넘지만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영어에 익숙해지면 초중고, 대학, 취업까지 영어 걱정은 덜 하지 않겠나 싶다.


노원구 중계동의 이모(41)씨는 중학교 3학년 아들의 고등학교입시 준비에 한창이다. 공부 잘한다고 소문난 아들을 전국형자사고에 떡하니 입학시키는 게 꿈. 여름방학이 고비라는데 다행히 '엄친아' 스타일 아들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차근차근 입학전형에 맞는 준비를 해주고 있다. 이씨는 "아들이 전국형자사고 준비생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단연코 '영유' 덕분이다"고 말했다. 더 좋다는 영유를 찾아 몇 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3년을 보냈던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

기자들이 영유를 보낸 학부모들 20여 명을 만나본 결과, 물론 만족도가 낮은 사례도 있었고, 아이가 적응하지 못해 일반유치원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학부모들은 영어만큼은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많이 노출시켜주는 것이 좋았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학교영어는 영어가 아니다
마포구 한 초등학교 4학년인 손모(11)양은 매주 3시간인 학교 영어수업시간이 아주 곤혹스럽다. 아직도 학교수업은 알파벳의 다음단계 정도인 기초적인 문장을 읽고 말하는 정도의 수준. 영어학원에 몇 년째 다니고 있는 자신이나 친구들한테는 그저 졸지만 않으면 다행인 의미 없는 시간이다. 손양은 "이 정도 영어조차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 '학교영어는 영어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남권 아이들은 더 하다. 반포 한 초등학교 5학년 정모(12)군은 "40분짜리 수업을 일주일에 3번을 하는데, 학교영어는 너무 재미가 없다. 너무 잘 아는 내용을 다시 배우니 지겹기만 하다. 시간낭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매주 3시간씩 '시간낭비'시키는 게 학교영어의 현주소. 학교영어는 영어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아이들의 영어능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수 학부모들은 영어교육 때문에 자녀들을 사립초등학교로 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도봉구의 사립인 H초등학교의 영어교과과정은 이렇다.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영어실력 배양이 목표라고 한다. 미국초등학교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하고,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수학 포함)이 주 13시간이다. 매 시간 원어민 강사 3명이 세 그룹으로 수준별 수업을 진행한다. 또 하교 후에는 집에서 미국 현지인과 1대1 화상영어수업을 매일 30분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학교 입학 전에 예비영어교실에 참여해야 하고, 방과후 영어프로그램도 영어 에세이반, 영어 디베이팅반, 영어 스토리텔링반을 따로 운영한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는 "오히려 사립초등학교가 편법을 하는 것이 학생에게는 도움이 되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립초등학교에서 이렇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미 학생들의 입에서 '학교 영어는 영어가 아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대로 그냥 영어시간을 '쉬어가는 시간'으로 시간낭비 시키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미국영어와 한국영어, 따로 공부해야한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만의 오래된 가족형태가 '기러기'가족이다. 기러기아빠의 외롭고 피폐한 삶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온 기러기 자녀들이 영어 때문에 헤매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유창하게 들리는 그들의 '미국영어'가 평가위주의 '한국영어'와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3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양천구 모 중학교의 이모(15)군은 영어시간에 혼란을 느꼈다. 현재분사와 동명사에 대한 선생님의 장황한 설명이 수학공식을 이해하게 하듯 혼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미국현지학교에서도 전과목 A학점을 받을 정도였던 Y군은 학교영어수업을 못 따라가서 그날 당장 한국식 영어문법 전문 학원에 등록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뉴질랜드에 갔다가 5년 거주하고 온 신모(20)군은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말로 된 문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군은 "모의고사는 만점을 받았지만 학교내신영어는 1년 내내 70~80점대였다. 주관식이 문제였는데,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그대로 쓰는 걸 익히는데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외국생활의 경험이 없지만 영어를 잘하기로 소문난 반포의 한 중학교 2학년 이모군. 그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내신점수는 받을 수 있어도, 영어는 제대로 할 줄 모르게 된다"면서 "영어는 무조건 많이 듣고, 보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상적 교육열의 나라, 영어만큼은 나라가 책임져라
각 가정마다 사교육비 부담이 엄청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중에서도 유아, 초등생의 사교육비 비중은 영어에 크게 쏠려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예체능 포함해서 초등학생 사교육비 지출 가운데 영어가 차지하는 비율(2013년 기준)은 35%로 가장 높다. 영어유치원, 영어 학원, 영어도서관, 원어민과외, 전화영어 등등 별의별 형태의 영어사교육이 성행하고 난립하고 있다.

중고등 입시생 뒷바라지는 제쳐두고서라도 고작 열 살도 안 먹은 아이들을 학교 끝나면 또 학원가방 들고 영어 학원버스에 태워 보내야하는 현실만큼은 이제 바꿔줘야 한다. 그런데 각 가정에서 알아서 바꾸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만큼은 나라가 해야 한다. 국제중, 특목고, 자사고 등의 설립과 지정으로 입시전쟁을 몇 년씩이나 밑으로 끌어내린 나라에서 아이들 영어교육의 부담까지 각 가정에 다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너무나 끔찍한 부담이다.

2012 수능영어 출제위원이었던 이흥수 전남대 명예교수는 "영어는 사실상 중학교 때까지 기본적인 교육을 끝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사교육이 커질 거라는 우려 때문에 오히려 공교육에서의 영어교육이 막혀 있는 희한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아이들 영어는 이제 공교육이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 초등학교 6년 동안 학교만 보내놓으면 알아서 말하기 듣기가 어느 정도 되도록 해보자. 굳이 영어 학원 안보내도, 학교정규 수업과 방과 후 수업에서 영어에 충분히 노출시켜주자. 십 수 년을 공부하고도 '어륀지' 발음이 안 되는 현실을 벗어나게 해보자는 것.

사실 영어교육문제는 이미 꼬일대로 꼬여 풀 수조차 없다. 입시 제도를 바꾸면 그 입시제도에 맞는 사교육이 판을 친다. 입시까지 한꺼번에 어떻게 다 바꿀 수는 없으니, 일단 공립초등학교 영어교육시스템이라도 엎어버리는 파격적시도가 필요하다. 영어 학원으로 몰려가야하는 부담은 적어도 초등학생에게는 덧씌우지 말자는 말이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소통영어'가 자연스럽게 되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1~5층까지 영어학원 18개, 수학학원 25개가 모여있는 목동의 한 건물.1~5층까지 영어학원 18개, 수학학원 25개가 모여있는 목동의 한 건물.
영어가 만만해져야 국어, 한국사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우선,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말문이 트이게 해주자. 학교가면 하루 몇 시간씩 영어를 듣고 말하고 노래하게 하자. 더 이상 비용 때문에 안 된다는 소리를 하기는 힘들다. 온갖 영어교재와 영어사이트가 인터넷에 무수히 널려있다. 국가차원에서 어린이 영어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매일 수업시간에 노출시켜주면 된다. 사교육현장의 강사들을 공교육으로 끌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각 학교마다 갖추어져있는 시청각교육시설을 충분히 활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동덕여대 영어교육과 김인석 교수는 "일반생활이나 업무적인 영어를 하려면 최소 2000시간의 영어학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규영어수업과정은 10년동안 1000시간정도다. 영어노출시간 자체를 대폭 늘여야 한다. 말하기 쓰기 위주의 의사소통을 위한 영어를 시켜야한다. 멀티미디어 수업 툴을 개발해서 정규교육에 활용하는 것이 최선이다"고 말했다.

영어가 제일 중요해서 열심히 하자는 게 아니라, 영어가 만만해 질수 있도록 일찌감치 영어를 시켜버리자는 말이다. 유치원생부터 중고등학생, 대학입시, 취업준비까지 내내 이십년을 넘게 돈을 갖다 붓고 머리를 싸매고 해도, 영어가 두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정작 해야 할 공부, 하고 싶은 공부는 태산인데, 영어하느라 다른 공부가 뒷전이 되어버렸다. 대학입학 때도 취업준비에도 대부분의 시간이 영어에 할애되는 현실을 대물림 하지 말고, 우리아이들에게 영어가 우스워지도록 해주자.

최소한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영어말하기 영어듣기가 만만해지도록 하자. 1년에 수천 만원씩 들여서 영유 보내지 않아도 되도록, 아빠와 생이별하고 조기유학 떠나지 않아도 되도록, 학교 끝나면 또 영어학원 버스타고 가지 않아도 되도록, 영어교육 만큼은 나라에서 책임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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