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주식 대중화 앞당긴 공모주 붐

머니투데이 강성진 2014.07.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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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 <17> 증권 반세기 공모주 청약 붐과 건설주 열풍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주식시장 대중화와 함께 투자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1978년 8월 삼보증권 전국 지점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오른쪽).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주식시장 대중화와 함께 투자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1978년 8월 삼보증권 전국 지점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오른쪽).


◇"공부하는 삼보 맨" 강조..전국 지점 돌며 "성공은 고객의 수익률에 달려 있다" 독려
아마도 내가 삼보증권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는 "공부하는 삼보 맨이 돼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전 직원들에게 늘 이 말을 강조했는데, 삼보증권 직원이 똑똑해야 고객의 수익률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지금이야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에서 얼마든지 투자 정보를 구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고객들이 창구에 있는 증권회사 직원들에게 의지했다. 기업실적이나 재무구조를 파악해 투자하는 고객은 거의 없었고, 창구 직원들이 전해주는 정보와 지식에 따라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고객에게 더 나은 조언을 해주려면 삼보증권 직원들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고객들의 수익률도 올라갈 것이고 자연히 삼보증권을 찾는 단골 고객도 늘어날 것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삼보증권의 시장점유율은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74년의 경우 전체 증권시장 거래대금이 주식과 채권을 합쳐 3641억원이었는데 삼보증권이 779억원으로 점유율이 무려 21.3%에 달했다. 당시 증권회사 수가 30개였으니 대단한 영업 실적이었다. 75년과 76년에도 시장점유율은 19.3%와 17.3%에 달했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날 하루는 전체 증권시장 약정고의 50%를 넘긴 날도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 무렵 전국을 돌며 개최한 지점장 회의에서 "삼보증권의 성공은 고객의 수익률에 달려 있다"고 독려한 것 외에는 사장으로서 특별히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삼보증권 특유의 1등 정신이 자연스럽게 약정고실적으로 이어졌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삼보증권을 신뢰해준 고객들의 힘이 있었다.



1977년 납회식 때 찍은 사진으로 삼보증권은 70년대 내내 증권거래소로부터 거래실적 우수상을 받았다. 1977년 납회식 때 찍은 사진으로 삼보증권은 70년대 내내 증권거래소로부터 거래실적 우수상을 받았다.
이 시기 삼보증권의 단골 고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백 할머니'로 많이 알려진 백희엽 씨다. 이북에서 월남한 백 할머니는 그야말로 아주 모범적인 투자자였는데, 반드시 우량기업에만 투자하고 한번 투자하면 적어도 2~3년은 보유했다. 특히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같은 재무제표를 한눈에 알아볼 줄 알았고, 부동산 같은 확실한 자산이 많고 순이익도 꾸준히 내는 기업을 선호했다. 일찌감치 가치주 투자를 했던 셈이다.

삼보증권과는 60년대 말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83년 삼보증권이 동양증권과 합병할 때까지 꾸준히 거래했고, 70년대 초 삼보증권의 유상증자에도 참여해 1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하기도 했다. 키가 15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할 정도 단신이었던 백 할머니는 상당한 자산을 보유한 거부이면서도 아주 검소하게 생활했다. 이분의 아들 박의송 군은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MBA 학위를 받고 귀국해 삼보증권에 입사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삼보증권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새벽 4시부터 청약 장사진...가명-차명으로 이중 삼중 청약 몰려
아무튼 70년대는 주식시장 대중화에 힘입어 증권 투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를 뒷받침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봇물처럼 쏟아진 신규 상장 주식이었다. 72년 12월 기업공개촉진법 제정에 이어 74년 5.29 조치와 75년 8.8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며 정부가 기업 공개를 강력히 밀어붙이자 주요 기업들의 주식시장 상장이 이어진 것이다. 68년부터 72년까지 5년 동안 34개 사에 불과했던 기업 공개 실적이 73년 한 해에만 35개 사로 늘었고, 75년에는 62개 사, 76년에는 87개 사에 달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도 72년까지 66개 사에 불과했던 것이 73년에는 104개 사로 늘었고, 75년에는 189개 사, 78년에는 356개 사로 급증했다. 상장주식 수의 증가와 함께 증시 거래대금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는데, 71년 409억원에 불과했던 것이 73년에는 1632억원, 75년에는 6936억원, 77년에는 3조115억원을 기록했다. 이를 반영하듯증권 투자 인구도 크게 늘어 76년에 처음으로 50만 명을 돌파했다. 발행시장과 유통시장 모두 급성장한 셈이었다.

이 무렵 기업 공개 열기에 힘입어 공모주 청약 붐이 일었는데, 각종 파동과 책동전으로 얼룩졌던 주식시장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정화하는 데 한 몫을 했다. 특히 신규 상장 기업의 주가는 통상 공모가보다 높게 형성됐고, 만일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 경우 증권회사가 2~6개월간 공모가를 유지해야 하는 시장 조성 의무가 있어 공모주는 그야말로 저위험 고수익 투자 수단으로 인기를 모았다.

공모주가 고수익-무위험 상품으로 인기를 끌자 청약 때마다 증권회사 주변에는 장사진이 형성되고 객장에 인파가 넘쳐났다. 1975년 6월 /사진=금융투자협회공모주가 고수익-무위험 상품으로 인기를 끌자 청약 때마다 증권회사 주변에는 장사진이 형성되고 객장에 인파가 넘쳐났다. 1975년 6월 /사진=금융투자협회
그러다 보니 공모주 청약이 있을 때마다 개인 투자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증권회사에서는 청약 신청서를 정리하느라 밤샘 작업을 예사로 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도 과열 청약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공모주 청약제도를 자주 바꾸었다.

처음에는 아무 제한 없이 청약 신청을 받아 청약한 주식 수에 비례해 배분했으나 이중 삼중 청약이 많아지자 청약 시 주민등록증을 제시토록 하거나

증권회사에 이름을 등록하도록 해 중복 청약을 방지했다. 그 뒤로는 청약저축 가입자에게 우선 배정을 해주기도 했고, 청약예금 가입자와 우리사주조합 등에게만 배정하고 일반인의 청약은 받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이처럼 1970년대 내내 공모주 청약제도는 빈번하게 바뀌었는데, 그만큼 우리나라 발행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증권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모주 청약을 받을 때마다 회사 주변에 장사진이 형성되고 객장에 인파가 넘쳐났다고는 해도 사장인 나로서는 실무진의 고충을 잘 알지 못했다. 한데 나중에 들어보니 청약자의 막도장이 가마니에 담아야 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누구나 제한 없이 가명이나 차명으로 청약할 수 있을 때의 얘기였지만, 직원들 말에 따르면 그럴 만도 했다. 거래 규모가 많은 소위 큰손고객이 한꺼번에 수억 원을 맡기면서 청약해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또 선착순으로 청약을 받았을 때는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회사 주위에 장사진이 형성됐는데, 그래서 청약이 있는 날이면 명동 인근의 여관이 만원을 이루곤 했다고 한다.

건설주 투기 붐으로 건설업종지수 3년여만에 52배나 뛰어..주식 폭락하자 뒤늦게 뛰어든 개인 손실
이 무렵 공모주 청약 열기와 함께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것이 건설주 투기 붐이었다. 75년부터 불붙기 시작한건설주 붐은 우리나라 증권시장 역사상 단일 업종으로는 가장 큰 폭등세를 기록한 것이었다. 75년 1월 4일 7.65포인트에 불과했던 건설업종 지수가 78년 6월 24일 409.91포인트까지 치솟았으니 무려 52배나 오른 셈이었다.
투기 붐까지 일었던 건설주 열풍이 식으면서 주가가 폭락하자 투자자들이 명동에서 증권거래소 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78년 11월22일 /사진=금융투자협회<br>
투기 붐까지 일었던 건설주 열풍이 식으면서 주가가 폭락하자 투자자들이 명동에서 증권거래소 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78년 11월22일 /사진=금융투자협회
이 같은 건설주 열풍은 73년의 1차 오일쇼크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막대한 오일머니를 거머쥔 중동 산유국들이 건설공사 발주를 늘리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중동 특수 덕분에 건설사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자 어느 건설회사 중역이 중동에 출장 갔다는 소문만 돌아도 주가가 올랐고, 어느 기업이 정관에 신규 사업으로 해외 건설이란 문구를 추가하기만 해도 무조건 주가가 뛰었다.

하지만 과도한 투기 붐은 결국 잔뜩 거품만 키운 채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건설사 주가가 폭락하자 뒤늦게 뛰어든 개인 투자자들만 손실을 입었다. 이 무렵 지점을 돌다 삼보증권 고객들을 만나면 내가 꼭 해주던 말이 있다. “주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목표 수익률을 낮춰라. 은행 금리보다 조금만 높으면 충분하다.”

사실 주식시장에서는 엄청난 수익률을 노리고 무모하게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게 아니다. 투자를 잘하는 사람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반세기 넘게 증권시장을 지켜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아무튼 내가 삼보증권의 전국적인 지점망 구축에 힘을 쏟고 있던 76년 12월 증권거래법이 전면 개정돼 증권회사의 업무가 자기매매, 위탁매매, 인수주선 업무,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됐다. 정부는 증권회사의 전문화와 대형화를 위해 이들 세 가지 업무를 모두 취급하려면 30억원 이상의 자본금을 갖추도록 했다. 삼보증권은 이미 76년 9월 기업 공개를 단행해 자본금을 30억원으로 늘렸고, 77년과 82년 두 차례의 유상증자를 통해 다시 80억원으로 증액했다.

우리나라 증권회사도 본격적으로 대형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제 몸집을 키웠으니 더 이상 국내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됐다. 하루빨리 국제무대로 나가야 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커지면 당연히 세계적인 대형 증권회사들이 들어올 터였다. 이들과 경쟁하려면 우리도 세계로 나가야 했다. 세계시장 진출은 삼보증권이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미래 전략이었다. 국제화가 시급했다.
(18회는 국제부 신설과 세계시장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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