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첫 페임랩 결선…"중간에 박수갈채 터졌죠, 이런 적 처음"

머니투데이 류준영 기자 2014.06.16 05:10
글자크기

김재혁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원 참관기

페임랩 한국 대표 지웅배 씨(연세대 천문우주학 학부생)가 발표를 하고 있다/사진=페임랩 페임랩 한국 대표 지웅배 씨(연세대 천문우주학 학부생)가 발표를 하고 있다/사진=페임랩


"만약 '말하기 시험'으로 노벨상을 뽑는다면 이 분이 아마 1등일 거에요" 김재혁 한국과학창의재단창조경제문화팀 연구원은 '인류는 못생긴 동물을 혐오하고 멸종하기를 바란다'는 주제로 '첼튼엄 과학 페스티벌'에서 특강을 펼친 한 강연자 사진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연구원은 그를 우리나라로 치면 노량진 학원가 스타강사와 같다고 비유했다. 독특하게도 그는 석·박사 학위가 없다. 하지만 돈 주고도 모시기 힘든 섭외 1순위 과학강사로 통했다. 명함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페임래버(Famelaber)'.



지난 3일~8일, 엿새 간 페임래버들의 성지(聖地)로 통하는 영국 중부 첼튼엄에선 젊은 과학도들의 과학기술 발표 경연대회 이른바 '페임랩'이 열렸다. 12일 기자와 만난 김 연구원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머릿 속에 정리한 출장보고서를 장장 3시간 넘게 풀어놨다.
김재혁 한국과학창의재단 창조경제문화팀 연구원(사진 우측 3번째)이 미래창조과학부 및 영국문화원 직원들과 첼튼엄 과학 페스티벌 현장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김재혁 연구원김재혁 한국과학창의재단 창조경제문화팀 연구원(사진 우측 3번째)이 미래창조과학부 및 영국문화원 직원들과 첼튼엄 과학 페스티벌 현장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김재혁 연구원
페임랩은 프리젠테이션(PPT) 등의 별도의 발표자료 없이 과학적 주제를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3분 이내 발표하는 이공계 버전의 '테드'(TED,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와 같은 경연대회이다.

당일 대회 현장에선 유명 사이언스코미디그룹 '빅밴'(Big Ban)이 떴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과학기술을 쉽게 설명하다 못해 이젠 개그 소재로 승화시킨 빅밴은 외계문명의 수를 예측해 볼 수 있는 '드레이크 방정식'을 통해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들 역시 페임래버 출신자격으로 축제를 찾았다.



이 대회 첫 테이프는 2005년 끊었지만 우리나라는 이번이 첫 신고식이다. 한국 대표로 지웅배 씨(연세대 천문우주학 학부생)가 첫 출전권을 획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은 못해도 세계대회 6위권 안에 들겠다는 다부진 출사표를 던졌지만, 현실의 벽은 녹록치 않았다. 23명의 본선 진출자가 치루는 3번의 준결승 첫 라운드에서 고배를 마셨다. 지 씨는 "꿈의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지웅배씨가 발표중 플랜카드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사진=페임랩 지웅배씨가 발표중 플랜카드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사진=페임랩
하지만 지 씨는 이번 대회 관계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라는 1차 미션은 달성했다. 지 씨가 'ART(예술)'라고 새겨진 카드를 꺼내 들고 양쪽 모서리를 펼치자 'E(Energy·동력자원)'와 'H(hydrogen·수소)'가 붙은 'EARTH(지구)'라는 플랜카드가 완성됐다. 지 씨만의 '비장의 한 수'였다. 요즘 말마따나 '고급진' 발표자료는 아니었지만 그의 진정성은 객석에 울림을 안겨 줬다. 이번 대회 통틀어 발표 중간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은 진출자는 오직 지씨 뿐. 애쉴리 켄트 첼튼엄 과학축제 총괄은 "동양인의 자그마한 퍼포먼스가 객석에 우주만한 큰 감동을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지 씨는 페임랩 본부와 영국문화원에서 파견한 전문스피칭코칭스텝들로부터 일대 일 특훈을 2달간 받았다. 김 연구원은 "출전국에 코칭스텝을 모두 파견해 발음교정까지 일일이 훈련을 시키는 등 행사 퀄리티(quality·품질)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무척 인상깊었다"고 전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은 질의응답용 예상답변지를 30문항까지 뽑아 꼼꼼히 체크하며, 지 씨가 자다가도 툭 치면 발표내용이 원어민 수준의 발음으로 줄줄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연습시켰다. 또 3명의 심사위원 및 방문객들과 친근감 형성을 위해 발표장 현지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영국 록그룹 비틀즈(The Beatles) 음악인 '렛잇비'(Let It Be)를 전략적으로 삽입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각종 소품을 들고 나온 페임랩 결선 진출자들/사진=페임랩 각종 소품을 들고 나온 페임랩 결선 진출자들/사진=페임랩
김 연구원은 "관찰해 보니 비영어권 국가대표일수록 소품 활용도가 높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SF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을 통해 빛의 성질을 설명하고, 어떤 이는 아예 잠옷과 안대를 입고 쓴 채로 나와 수면과 뇌·인지과학에 대한 연구내용을 풀었다.

결선에선 BT(바이오기술) 분야 최신 연구 트렌드를 관통한 발표가 수상을 휩쓸었다. '대상'을 수상한 베네룩스(Benelux,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3국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3국의 총칭) 대표 포릭(Padraic)은 "1950년대 1차 그린혁명(품종계량)을 통해 식량난을 극복했다면, 2차 그린혁명은 인간의 유전자 변이를 시도해 음식을 섭취하지 않더라도 햇빛 광합성만으로 살아갈 영양분을 자체 생산해 낼 것"이라며 남다른 촉을 세운 연구주제로 이목을 끌었다.

'청중이 뽑은 우승자상'을 받은 프랑스 대표 데이빗(David)은 "뇌에서 수화를 관장하는 부분과 언어를 소리로 표현하는 부분이 같다"는 내용으로 수화를 한다면 언어능력 역시 의료기술 발전을 통해 원상복귀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참관객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은 이들 수상자와 우리나라 대표선수가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그 우열(優劣)을 가려봤다. 김 연구원은 먼저 '지나친 경쟁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출전자들 간 오리엔테이션이나 미팅시간이 자주 주어져서 한국대표 지 씨에게 다른 경쟁자들에게 정보를 절대 주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하지만 이는 진부한 생각이었다.
페임랩 출전 선수들 오리엔테이션이 열리고 있는 행사장 모습/사진=페임랩  페임랩 출전 선수들 오리엔테이션이 열리고 있는 행사장 모습/사진=페임랩
선수들끼리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전 팁도 감춤 없이 나누고, 경쟁상대가 가지고 온 주제로 미니 토론회를 약식으로 진행하는 등 마지막 라운드까지 어렵게 올라온 선수라고 보기엔 어색한 모습을 연출했다.

김 연구원은 이런 모습을 보고 반성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한국과는 딴 판의 경합무대 분위기였던 것 같다"며 "다음부턴 수상 그 자체에 매달리기 보다는 대회자체를 즐기는 자세부터 가지도록 훈련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발표를 위한 발표도 지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연구원은 "발표자들의 제스처는 춤추듯 무척 격렬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연기를 하려 애썼고, 수상한 해외 출전자는 무대에서 그냥 놀았던 것 같다"고 표현했다.
제스처가 화려한 페임랩 출전자들/사진=페임랩  제스처가 화려한 페임랩 출전자들/사진=페임랩
전 세계 33개국엔 5000여명의 페임래버들이 난해한 과학기술 정보를 대중에게 널리 쉽게 알리기 위한 과학소통전문가(Science Communicator)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연구원은 "대학 연구실 석·박사들에게 '네가 하고 있는 연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이해하기 쉽도록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될 것"이라며 국내 산·학·연 공동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진단했다.

또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를 남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소통능력까지 겸비해야 '진짜 연구자'일 것"이라며 "페임랩 참여를 독려해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하고, 서로 다른 분야 연구소 간 벽도 함께 허물겠다"고 강조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