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 증권파동 겪고 기업공개 활성화법 열매

머니투데이 강성진 2014.06.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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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 (11) 자본시장육성법 제정

편집자주 강성진(姜聲振) 전 증권업협회장은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원로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50년대 증권업계에 입문해 각종 파동을 현장 한가운데서 지켜봤고 60년대에는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회사로 키워냈다. 강 회장은 90년에는 협회장으로 선출돼 증시안정기금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98년부터 10년간 증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강 회장은 20회에 걸쳐 연재할 '증권 반세기' 회고록을 통해 그동안 몸소 겪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격동과 성장과정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에 따라 1968년 12월 16일 설립된 한국투자개발공사는 발행시장 개척을 통해 초창기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69년 2월 24일 열린 증권연수원 개원식 모습.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에 따라 1968년 12월 16일 설립된 한국투자개발공사는 발행시장 개척을 통해 초창기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69년 2월 24일 열린 증권연수원 개원식 모습.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주식=투기' 인식에 '자본시장육성법' 표류, 4년만에 겨우 국회통과
주식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 기능이 동시에 존재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장기적인 산업자본을 조달하는 수단이고,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기업 이윤에 대한 투자이자 저축수단이다. 영어에도 주식을 뜻하는 단어가 스톡(Stock)과 셰어(Share), 두 가지가 있는데 스톡은 나무줄기처럼 기업의 근간이 되는 자본을 의미하고, 셰어는 기업의 이익을 나눠가진다는 의미다.

증권시장도 이 두 가지 기능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데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이다. 발행시장은 정부나 기업이 채권과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1차 시장(Primary Market)이고, 유통시장은 이렇게 발행된 채권과 주식이 투자자들 간에 매매되는 2차 시장(Secondary Market)이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사실상 유통시장이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발행시장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대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1968년 제정된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법의 제정 목적은 '기업공개와 주식 분산을 촉진하고 국민의 기업 참여와 자본 조달의 원활을 기할 수 있는 투자여건을 조성함으로써 자본시장의 건전한 육성을 도모하는 것'이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보다 많은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시키자는 것이었다. 기업공개가 잘 이뤄지면 주식 분산도 자연히 잘 될 것이고, 주식 분산이 제대로 되면 그 자체로 많은 국민이 기업에 참여할 것이었다.

이 법은 공화당 소속으로 6대, 7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남준씨가 처음 구상한 것인데 이 의원의 집념과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입법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이 의원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언론계에서 잠시 일하다 작은 무역회사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증권업계에 있던 친구를 통해 우연한 기회에 주식시장에 입문하게 됐는데, 증권 파동을 계기로 주식을 깊이 연구하게 됐던 것 같다.



내가 이 의원을 알게 된 것도 1962년 5월 무렵이었다. 증권 파동이 나자 그는 앞장서 투자자 모임을 만들고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투자자들과 함께 정부에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내기도 했는데, 주식 투자로 돈을 벌 생각보다 증권시장에 관한 이론이나 제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와 이 의원은 맨 처음에 증권회사 대표와 고객으로 만났지만 증권 파동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주 만났다. 나이는 이 의원이 나보다 여덟살 많았으나 생각도 비슷하고 공통점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차례 증권시장에 관해 토론을 벌였는데 그때마다 상당히 학구적인 자세로 파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잠시 접촉이 뜸했는데 1963년 11월26일에 실시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진도에서 당선된 것이다. 나는 이 의원의 당선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1965년 1월 초로 기억되는데 이 의원을 우연히 대면하게 된 자리에서 나에게 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본시장육성법안 통과를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 최초 발의한 이남준 의원은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눈믈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자본시장육성법안 통과를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 최초 발의한 이남준 의원은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눈믈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선진국 증권시장에 대해 많은 책과 자료를 읽고 공부했는데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려면 증권시장의 육성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 이상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는 법을 꼭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 의원의 말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 무렵까지도 우리나라 증권시장에서 발행시장은 사실상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증권시장을 기업자금의 조달창구로 키워나가려면 발행시장의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유통시장 역시 주가가 일부 세력에 의해 급등락하는 일이 없도록 안정시켜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려면 주식시장의 규모가 커져야 했다. 또 주식시장에 개입해 주가 안정을 위한 공개조작을 할 수 있도록 별도 기관을 설립하는 게 필요했는데, 이 생각은 투자개발공사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아무튼 이 의원은 그해 1월27일 '주식투자 보장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 법안은 그 뒤 '주식투자 촉진법안'으로 고쳐졌고, 다시 '한국투자진흥공사법안'으로 바뀌어졌다가 결국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1월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4년에 가까운 산고 끝에 비로소 이 법이 탄생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국회 재경위원회와 법사위원회를 통과하고 법안이 본회의에 회부된 게 10월29일이었는데, 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둘러싼 대정부 질문이 쏟아지는 바람에 법안 통과가 계속 연기됐던 것이다. 이 의원은 혼자 힘으로 여야 총무단과 운영위원장을 설득해 마침내 여야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의원은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실 자본시장 육성법이 제정될 때까지도 증권시장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진 국회의원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5월 파동을 비롯한 잇단 증권 파동으로 인해 주식이라고 하면 무조건 투기를 떠올리고 주식은 위험한 것이며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의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남준 의원이 열성적으로 법안 설명을 하러 다니면 동료의원들이 그를 향해 "대체 얼마나 많은 주식을 갖고 있기에 그토록 열심이냐"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국회에서 '증권의원'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진돗개'라는 별명답게 그런 말에 기가 꺾일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자본시장 육성법을 제정하려 한다는 이런저런 모함과 비협조로 고민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했다.

이 의원은 청와대에서 기업공개와 주식 대중화를 통한 내자 동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설명을 다 듣고 난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공화당 지도부와 경제기획원, 재무부에 전화를 걸어 법안을 자세히 검토한 뒤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주무부처인 재무부에는 그때까지 증권보험국은 없었고 이재국 산하에 증권과가 있었는데, 맨 처음 법안 입안 때는 김원기씨가 이재국장이었고, 7대 국회가 시작된 1967년에는 장덕진 이재국장과 하동선 증권과장이 법 제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수행한 기업공개지도업무는 증권감독원이, 투자신탁과 증권저축업무는 대한투자신탁이 각각 맡으면서 공사는 설립 8년여 만에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사진은 1977년 1월 8일 열린 대한투자신탁 창립총회(왼쪽)와 2월 19일 열린 증권관리위원회 발족 및 증권감독원 개원식 장면.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수행한 기업공개지도업무는 증권감독원이, 투자신탁과 증권저축업무는 대한투자신탁이 각각 맡으면서 공사는 설립 8년여 만에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사진은 1977년 1월 8일 열린 대한투자신탁 창립총회(왼쪽)와 2월 19일 열린 증권관리위원회 발족 및 증권감독원 개원식 장면.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 15억 자본금 모아 한국투자개발공사 출범, 증시 발전 토대 됐지만…

우리나라 증권시장 발전에 전기를 마련해준 한국투자개발공사도 바로 이 법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1968년 12월16일 공사 현판식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축하해줬다. 투자개발공사는 정부와 산업은행이 5억원씩, 7개 시중은행이 5억원을 출자해 모두 15억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됐다. 주된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유가증권의 인수와 모집, 매출의 주선 같은 발행시장부문과 주가안정을 위한 시장조절 기능이었다.

특히 시장조절 기능은 당시 증권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요소와도 같았던 주가의 빈번한 폭등과 폭락을 막아줄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투자개발공사의 자본금이 15억원에 불과했던 데다 그나마 은행 출자분은 모두 정기예금으로 다시 예치하는 바람에 시장조절에 필요한 자금 동원력이 극히 미약했다. 그러다보니 주식시장의 침체로 주가가 떨어지는 데도 투자개발공사가 개입하지 않는다며 증권회사와 투자자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투자개발공사의 초대 총재로 임명된 이병순씨는 취임 초부터 이런 비난에 시달려야 했는데 하루는 나를 만난 자리에서 시장조절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총재에게 오히려 소신대로 하라고 말해줬다. 법에서 역할을 부여했다고는 해도 현재 투자개발공사의 자금력으로는 강력한 시장개입이 불가능하니 투자자들의 비난에 신경쓰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이 총재는 나처럼 말해주는 증권업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며 투자개발공사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데 대해 고마워했다.

투자개발공사는 1977년 2월 증권감독원과 대한투자신탁이 설립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할 때까지 시장조절을 위한 공개조작을 서너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발행시장의 개척과 증권 투자신탁 제도의 개발과 같은 다각적인 시장 저변 확대에 기여한 것만으로도 시장조절 기능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본다. 아무튼 투자개발공사의 발족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을 뒤흔드는 또 한 차례 파동이 벌어진다. 이것이 마지막 증권 파동이었지만 이번에는 파동의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12회는 '증금주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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