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대신 양산품만…3초백·5초백 '들러리 한국'

머니투데이 송지유 기자 2014.06.1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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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K메이드'를 키우자]<1회 ①>한국 명품산업의 현주소

편집자주 명품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연간 300조원에 달하는 세계 명품시장에서 한국은 전혀 매출이 없고, 철저히 소비만 하는 국가다. 명품의 본고장인 유럽은 물론 미국과 일본 등이 세계 명품 시장을 놓고 자국 브랜드로 맹활약하고 있지만 한국은 유독 명품 분야만큼은 힘을 쓰지 못한다.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제 한국형 명품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이에 세계 명품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들을 찾아 그들이 명품이 된 노하우와 역사를 분석하고, 한국 패션기업들의 명품을 향한 고민들을 들어본다. 세계 명품시장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는 한국형 명품의 탄생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들도 진단해본다.

/그래픽=머니투데이/그래픽=머니투데이


2010년 4월1일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현재 사장)가 인천국제공항에 등장했다. 한국을 방문한 '명품 황제'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그룹 회장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온 것이다. 같은 날 오후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과 면세점으로 아르노 회장을 직접 안내했고,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현재 회장)도 1시간 넘게 그와 환담했다.

이후에도 아르노 회장이 한국을 찾을 때마다 유통기업 오너들의 만남은 경쟁적으로 계속됐다.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유통기업 총수들이 명품기업 회장을 만나려고 적극 나선 것은 백화점이나 면세점에서 루이비통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대한민국은 자의건 타의건 명품에 빠져있다. 길거리에서 똑같은 수입 브랜드 가방을 든 사람을 3초마다 마주친다고 해서 '3초백'(루이비통)이니 '5초백'(구찌)이니 '7초백'(에트로)이니 하는 별칭이 생겼을 정도다. 그만큼 명품 소비는 대중화됐다.

서울시내 주요 백화점 1∼2층 노른자위에는 어김없이 명품 매장이 입점해 있다. 명품 브랜드 간판이 백화점 이미지와 매출에 직결되는 만큼 유통업계는 판매수수료, 리뉴얼비용 등 면에서 한국 브랜드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입점 경쟁을 벌인다.



◇글로벌 명품시장 300조…한국 명품소비 세계 8위=최근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베인앤컴퍼니가 발간한 '2013 전세계 명품시장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명품시장 규모는 2170억유로(한화 약 300조원)다.

연도별로는 △2009년 1530억유로(212조원) △2010년 1730억유로(239조원) △2011년 1920억유로(266조원) △2012년 2120억유로(293조원) 규모였다. 지난해는 전년 대비 2% 성장하는데 그쳤지만 전 세계 불황에도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지속했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83억유로(12조원)로 세계 8위 규모다. 미국이 625억유로(86조원)로 독보적인 1위이다. 이어 일본 172억유로(24조원), 이탈리아 161억유로(22조원), 중국 153억유로(21조원) 등으로 2∼5위로 조사됐다. 이어 프랑스 151억유로(21조원), 영국 121억유로(17조원), 독일 99억유로(14조원) 등이 한국보다 명품시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무관세제도로 아시아 거대 명품시장으로 부상한 홍콩(77억유로, 11조원), 러시아(58억유로, 8조원) 등은 오히려 한국보다 명품시장 규모가 작다.

송지혜 베인앤컴퍼니코리아 파트너(부사장)는 "한국은 명품에 대한 선호도가 강하고 확산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며 "인구수나 소득수준 등을 감안해 분석하면 세계 5위권 시장에 속한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 루이비통 면세매장. 루이비통은 전세계 공항 면세점 중 최초로 한국 인천국제공항에 매장을 열었다. /사진제공=신라면세점인천국제공항 루이비통 면세매장. 루이비통은 전세계 공항 면세점 중 최초로 한국 인천국제공항에 매장을 열었다. /사진제공=신라면세점
◇한국은 명품시장 들러리(?)…돈 못 벌고 소비만=이처럼 국내 명품시장이 커지는 것은 경제 발전과 연관이 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사례를 비춰볼 때도 명품시장이 급성장하는 시점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전후였다. 송 파트너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환율과 금리 상승에 200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자산을 불린 계층이 신분 과시 수단으로 명품을 활용했다"며 "실제 이 시기에 명품시장이 큰 폭 성장했다"고 밝혔다.

명품 소비는 대국이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명품으로 인정받는 한국 브랜드가 거의 없는 것은 치명적 문제다. 최근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인기가 많은 MCM 등 매스티지(대중 명품) 브랜드를 제외하면 한국은 명품 브랜드의 무풍지대인 셈이다. 매년 명품 수입은 늘고 있지만 정작 명품 수출은 제자리인 국가. 한국 명품 산업의 현 주소다.

반면 루이비통, 에르메스, 샤넬 등 명품 브랜드를 배출한 프랑스는 명품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대표주자인 LVMH그룹의 경우 루이비통을 비롯해 크리시찬 디올, 지방시, 셀린느, 로에베, 불가리 등 명품 브랜드만 60여개에 달한다. 지난해 이들 브랜드는 40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 세계 명품시장의 13%를 차지하는 규모로 삼성패션연구소가 발표한 올해 한국 패션시장 전체 규모(36조5000억원)보다 많은 금액이다. 구찌와 보테가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브랜드를 보유한 케어링그룹은 단일 그룹으로 13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정재우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이미 창의력 넘치는 우수한 디자이너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한국은 이들을 글로벌 시장에 소개하고 상품화하는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며 "패션산업을 글로벌 비즈니스로 키우려는 정부와 기업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쟁력을 갖춘 한국형 콘텐츠를 육성하는 한편 비즈니스 차원에서 해외 브랜드 인수합병(M&A) 등도 고려할 만한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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