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고 떠도는 돈…대기자금만 707조원

머니투데이 신수영 기자, 오정은 기자 2014.06.18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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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저성장·저금리, 삶을 뒤흔든다]<2>돈은 있는데 돈이 없다

#"2년이나 3년 만기 정기예금에 들어둘 걸 그랬어." 서울 사당동에 사는 A씨는 요즘 틈만 나면 푸념이다. 1년 전만 해도 3% 안팎이던 1년 만기 저축성 예금의 금리가 최근 2% 중반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5년 전 은퇴한 그는 은행 예금에서 나오는 이자와 국민연금, 작은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 산다. "0.1%포인트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1억 원을 예금했으면 10만 원을 더 받는다고." 예금 외에 뾰족한 수가 없어 계속 1년씩 재예치했지만 이러다가는 생활비가 너무 줄게 생겼다. 요즘은 '혹시 투자할 만 한데가 있나' 싶어 만기가 돌아온 예금 하나를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 두고 인터넷 재테크 사이트 등을 기웃대는 중이다.

시중에 돈이 넘쳐 난다. 현금이나 '현금에 준하는' 자금이 갈 곳을 몰라 떠돈다. 돈은 세야 맛이라지만 불리는 것도 맛인데, 앉아서 돈만 세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좋은 시절이 왔기 때문은 아니다. 그만큼 눈치 보기를 하는 자금이 많아진 탓이다.



1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시중에 떠도는 단기 부동자금(대기성 자금)은 4월 현재 707조296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단기 부동자금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가파르게 증가해 2010년 3월 620조원을 넘어선 뒤 감소했으나 2011년 말부터 다시 증가세를 타고 있다.

갈 곳 잃고 떠도는 돈…대기자금만 707조원


통상 단기 부동자금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여기서는 현금과 현금처럼 자유롭게 입출금이 가능한 상품들을 모두 합쳐 합산했다.



이중에서도 현금통화(현금)의 증가세가 눈에 띈다. 4월 현재 55조9070억 원(이하 평잔 기준)을 기록하면서 56조원에 바짝 다가섰다. 지난해 말 52조8750억 원에 비해서는 3조원 이상 증가했다.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저축성 예금 등에도 124조3820억 원과 335조7870억 원의 돈이 대기 중이다. 금리가 0.1~0.2%에 불과하지만 자유롭게 뺄 수 있어 현금에 준하는 금융상품들이다. 규모는 작년 말보다 4조5000억 원과 1조6000억 원씩 각각 늘었다.

증권사 RP(환매조건부채권) 등과 같은 단기 금융상품에는 기업들의 돈이 몰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유자금을 1년 이하의 은행 예금에 묻어뒀던 기업들이 MMT 등(머니마켓신탁)나 채권혼합형펀드, RP 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주식에 투자되지 못하고 증시 언저리를 맴도는 자금도 날로 증가세다. 증권사의 투자자예탁금은 최근 한두 달 사이 14조~15조원에서 감소할 줄을 모르고 있다.

갈 곳 잃고 떠도는 돈…대기자금만 707조원
돈이 떠도는 가장 큰 이유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다. 송두환 농협은행 거시금융연구실장은 "저성장, 저금리는 우리가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라며 "글로벌 유동성도 넘쳐나면서 돈은 많은데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미국의 테이퍼링(점진적 자산매입 축소, 양적완화 축소) 종료 등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선뜻 움직이기를 꺼리는 자금이 많다. 국내 역시 한은이 금리정상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지만, 정상화 시기가 언제가 될 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같은 자금 단기화는 장기투자 등을 어렵게 하고 필요한 곳에 돈이 흘러가지 못하는 돈맥경화 현상을 부추길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한층 더뎌진 경기회복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갈 곳 모르는 자금이 한곳에 빠르게 몰리며 자산버블 현상을 빚어낼 수도 있다.

◇개인, 깊어지는 빈익빈 부익부=

국내에서 저금리가 본격화될 조짐이 나타난 것은 2000년대 초부터다. 전환점이 된 역사적 이벤트를 꼽자면 IMF 외환위기다. 시중에는 유동성이 흘러 넘쳤고, 기업들은 순익을 내면서도 설비투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중금리는 3%대에서 2%대로 추락 중이다. 보통사람들이 저축으로 쌈짓돈을 불리거나, 여윳돈을 묻어두기 어려운 시대가 온 것이다.

현재 1년 정기예금 금리는 2%대 중반에 불과하다. 4월 현재 저축성 수신금리(신규취급액 기준)는 2.60%로 한은이 관련통계를 집계한 1996년 이후 가장 낮다. 금리가 2.0%이상 3.0% 미만인 정기예금은 비중이 무려 96.2%에 달한다.

한때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아 인기였던 저축은행과 새마을금고 등의 1년 예금금리도 2.86%와 2.79%를 기록하며 추락 중이다. 그래도 예금밖에 없다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부동산 시장도 시들하고 주식에 투자하기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더 높은 금리를 찾아 떠도는 유랑민이 생기는 것도 그래서다.

부자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들은 저금리 기조가 시작된 2000년대에 들어서도 2000년대 초 기술주 버블과 2000년대 중반 부동산 호황 등으로 또다시 돈을 불릴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차곡차곡 부를 늘리는 모습이다. 하나은행의 '2013년 코리안 웰스 리포트'에 따르면 국내 10억 원 이상의 부자들은 15만6000명(전체 인구의 0.3%)으로 전체 개인 금융자산의 18%(461억 원)을 보유했다. 이들의 금융자산 증가율은 개인 전체의 증가율 8.5% 보다 높은 9.2%였다.

지금은 실탄을 확보하고 상황을 보고 있다. 송민우 신한은행 PWM프리빌리지(Privilege) 서울센터 팀장은 "공격적 성향을 가진 고객들은 현재 유동자금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저금리,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면서 정기예금 보다는 중수익, 중위험 형태의 상품으로 이동이 나타나고 있고, 이를 위한 대기성 자금도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가계의 단기 부동자금이 전체 부동자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단기 부동자금에서 가계(한은 자금순환 기준, 비영리법인 포함)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40%를 넘어섰다.

◇조달 보다 운용이 문제인 시대=

양극화 현상은 기업에서도 나타난다. 상황이 좋은 기업들은 유보금이 넘쳐나면서 자금의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로 변모 중이다. 투자 상품의 성격도 변화에 은행에서 증권, 투신 등으로 무게추가 옮겨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한 시중은행의 기업자금 담당 관계자는 "은행 예금금리가 너무 낮아 자금을 다른 곳에 분산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며 "다만 적극적으로 예금에서 이동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여전히 자금 수요자로 남아있는 중소기업은 금융사에는 계륵이다. 우량 중소기업에만 대출이 집중되며 '금리덤핑' 경쟁을 벌이는 웃지 못 할 현상도 나타난다.

시중 자금의 단기 부동화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11년 이후 안정세를 보이던 단기 부동자금이 최근 빠르게 늘고 있다"며 "경제주체들의 불안 심리를 해소해 가계 자금을 자본시장으로 유도하고,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는 등 선순환 대책이 수립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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