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환도열차'··· 1953년 부산발 열차를 타고 온 여인

머니투데이 이언주 기자 2014.03.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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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기자의 공연 박스오피스] "잃어버린 기억이 60년전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1953년 부산에서 출발한 서울행 기차가 느닷없이 2014년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자 부산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환도열차'에 올라탄 것인데 말이다. 집에 간다는 기쁨에 넘쳐 기차에 몸을 실었던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지순'만이 생존자로 60년 지난 서울을 마주한다.

1953년 부산서 출발한 '환도열차'를 타고 난데없이 2014년 서울에 도착한 지순. /사진=서울 예술의전당  1953년 부산서 출발한 '환도열차'를 타고 난데없이 2014년 서울에 도착한 지순. /사진=서울 예술의전당


"왜 열차에 타셨습니까?" (제이슨)
"냄편을 만나러···" (지순)
"아니, 그건 다 들었고, 누가 열차에 탄 것처럼 하라고 시켰습니까?" (제이슨)
"시킨 사람 없애요. 증말이에요. 왜 사람을 못 믿어요?" (지순)



갑자기 나타난 열차에 대해 한국은 미국과 공동조사를 벌인다. 한국계 미국인이자 미국 측 조사관 제이슨은 지순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인물이라 믿고 다그치지만 지순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왜 사람을 못 믿어요?"라는 지순. 거짓말 같은, 믿지 못할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이슨은 속으로 '어떻게 사람을 믿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언뜻 시간여행자의 이야긴가 할 수 있지만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다.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이 겪는 혼란과 환상보다는 지순의 눈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들여다보게 한다. 무엇보다 아흔 살이 된 남편 한상해는 자전거포에서 일하던 그 순박한 사람이 아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대기업 회장이 됐지만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들을 처단하고 온갖 계략과 술수를 개의치 않으며 오직 이익을 위해서만 살았고, 살고 있다. 한상해의 양자 한동교와 친딸 한수희 역시 마찬가지다. 지순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행태와 이 현실이 관객들은 낯설지가 않다.



지순은 서울과 부산 곳곳을 둘러보며 과거를 발견하고 현재를 들여다본다. 과거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지난 60년의 가족사, 민족사, 경제성장과 문화의 변천을 재확인한다. 그 사이 한상해가 친구의 첩이자 함께 살았던 여자를 죽이고, 자신의 아버지를 사주해 지순을 좋아했던 청년을 죽인 사실을 알게 돼 충격에 휩싸여 오열한다.

"이건 다 이야기예요.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말예요. 안 그럼 내가 어뜨케 부산에서 그 열차를 타고 60년을 건너서 여기 왔단 말예요? 어뜨케 이게 우리나라라고 말헐 수 있겠애요? 모두들 꿈을 꾸고 희망에 부풀어서 올라가면 어찌하갓다. 즌쟁이 끝나면 어찌하갓다. 그렇게 말했는데 우리가 어째 이리 될 수 있애요? 어뜨케 내 냄편이 다른 여자를 죽이고 그 불쌍한 청년을···"

이 연극은 잃어버린 우리의 인간성, 서정성을 일깨우는 다소 불편한 작품이다. 50년대 가난하고 힘들지만 정 많고 희망에 찬 인물들을 조명하며 추억을 돋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연결성, 극을 끌고 가는 과정에 빈틈이 없다. 탄탄한 대본의 힘과 적절히 잡았다 놨다하는 연출의 호흡, 배우들의 유연한 연기가 착착 맞물려 몰입하게 한다.


2시간50분짜리 연극. 생각만 해도 힘들겠다 싶지만 그렇지 않다. 공연이 끝나도 그 먹먹함이 한 동안 밀려와 2014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무조건 옛 것이 정겹고 훈훈하고 좋다는 건 아니다. 자칫 완전히 잃어버릴지 모를 서정성, 인간애에 대해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제이슨이 한국 정부 조사관에게 소리친 대사는 정곡을 찌른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 역겨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사실은 두려움이나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익숙해서 그렇다는 생각!"

◇연극 '환도열차'= 작·연출 장우재. 출연 윤상화·김정민·이주원·김용준·장성익·안병식·박무영·김지혜·김곽경희·유병훈·하성광·신영옥·소성섭·류제승·박기만·조연희·김동규·강병구·권진란·강선애·이은정·고광준. 4월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티켓 지정석(1층) 4만원·자유석(2~3층) 2만5000원. 문의 (02)580-1300.

연극 '환도열차'에서 본명 최양덕을 지운 채 '한상해'라는 다른 이름으로 60년을 살아온 인물(가운데)과 세월을 훌쩍 넘어와 낯선 남편을 마주하게 된 지순(오른쪽) /사진제공=서울 예술의전당 연극 '환도열차'에서 본명 최양덕을 지운 채 '한상해'라는 다른 이름으로 60년을 살아온 인물(가운데)과 세월을 훌쩍 넘어와 낯선 남편을 마주하게 된 지순(오른쪽) /사진제공=서울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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