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라의 초콜릿박스]'쉼표'도 음악의 일부랍니다

머니투데이 노엘라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 2014.03.05 05:15
글자크기
[노엘라의 초콜릿박스]'쉼표'도 음악의 일부랍니다


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 입는 옷들 투성이다. 여기저기서 혹시 언젠간 필요할지 몰라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옷, 신발, 가방, 오래된 모니터, 카메라 등등. 어느새 물건들이 방 한쪽에 수북이 쌓였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보니 또 아까운 생각이 든다. 쓸만한 물건들을 추려내 다시 넣는다.

문득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우물은 파는 것이 아니라 메우는 것이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우물은 흙을 파내는 것이지만 우물의 입장에선 삽 하나의 공간만큼 흙 대신 공기가 채워진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론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은 동양화로 옮겨갔다. 동양화에서 보여 지는 '여백의 미'. 그로 인해 완성되는 아름다움. 여백의 의미는 채워지고 남은 공간이 아니라 공간에게 할애된 자리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우리에게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주는 고마운 존재일지도.

그림의 여백처럼 음악에는 쉼표가 있다. 어릴 적 레슨시간, 음악의 한 구절을 연주하고 나니 쉼표가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나온다. 한참 동안 쉬는 것이 어색해 바로 이어 다음 악구를 연주한다. 그러자 선생님의 지적이 이어진다. "쉼표도 음악의 일부다. 쉼표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쉼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누려야 할 음악의 공간에 소리가 들어와 버린 셈이다. 쉼표가 정확하게 쉬어졌을 때 음악은 비로소 완성되고 그로 인해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여백, 쉼표, 공기, 그리고 삶. 늘 일해야 하고, 벌어야 하고, 이뤄야 하고, 채워야 하는 인생. 얼마 전 인터넷 게시판에서 회자 되었던 한국과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이 생각난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2000cc 급 중형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년 1회이상의 해외여행'이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는 차별화된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며,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자'라는 이야기.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다시 쳐다본다. 처음 정리를 시작할 때 나는 내가 물건을 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내가 하고 있던 것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생각의 관점을 달리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