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는 지금으로부터 2100여년 전에 나온 역사서다. 총 130편에 52만6,500자로 이루어진 3000년 통사다. 사마천은 이 130편 중에 경제와 관련된 편을 두 편 안배했는데, 이는 당시 수준으로는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전문적인 경제론을 담고 있는 '평준서(平准書)'와 경제 사상과 경제인에 관한 기록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이 바로 그 둘이다. 이 두 편을 통해 사마천은 당시 경제 상황은 물론 경제와 정치의 함수관계, 역대 부자들의 치부법 등을 날카로운 필치로 기록했다.
하지만 이 두 편에 대한 평가는 가혹했다. 2000년 가까이 혹평과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사마천 당시나 '사기'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런 비난은 없었다. 오히려 사마천을 '사마자(司馬子)'로 높이 부르면서 사마천의 경제관을 적극 옹호 내지 수용할 정도였다. 사마천의 경제관이나 경제 사상이 적어도 서한 시대까지는 전혀 이단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경제관과 진보적 경제 사상에 처음 문제를 제기하고 비난한 사람은 '사기'에 이은 두 번째 정사(正史)인 '한서(漢書)'를 편찬한 반표(班彪)·반고(班固) 부자였다. 이들
사마천의 경제 사상을 처음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많은 논란을 낳은 <한서>의 편찬자 반고.
사마천의 경제 사상에 대한 반고 부자의 비판은 그 후 정통주의에 매몰된 수구 학자들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들어졌다. 금나라 때 학자 왕약허(王若虛)는 사마천이 역시 '화식열전'에서 “선비입네 하는 자들이 동굴에 숨어 살면서 세상에 명성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결국은 부귀를 위한 것이다”라는 대목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벼슬을 거부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오래도록 빈천한 처지로 살면서도 말로만 인의(仁義)를 부르짖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 대목을 트집잡아 인의를 무시하고 빈천을 부끄럽게 여긴 사마천의 죄악은 죽여도 시원찮다고 극언했다.
◇기적의 명편
'화식열전'과 '평준서' 이후 중국 관찬 사서에서 경제관이나 경제 사상은 사라졌다. 그저 인구나 재정 상황 정도를 무미건조하게 기술한 '식화지'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중국 역사서의 수준과 역사가의 역사 의식은 사마천의 '사기'를 기점으로 후퇴했다. 오늘날 '화식열전'과 '평준서'는 기적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말 그대로 2000년 동안 저주를 받아온 명편이라 할 것이다. '사기'의 가치와 사마천의 역사 의식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저주받은 명편'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다. 부에 대한 추구를 인간의 본성이라 못박은 사마천의 경제 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부에 대한 보다 성숙된 논의를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다시 한번 사마천의 말이다.
“부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다. (중략) 농사를 짓는 사람이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든,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이건 이들이 재물을 모으고 불리는 것 역시 본래 재산을 더욱 늘리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능력을 한껏 짜내서 무슨 사업을 이루려는 것은 결국 전력을 다해 재물을 얻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