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쏟아부은 R&D성과, 물거품되는 까닭은

머니투데이 강경래 기자 2014.01.2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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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양극화 키우는 R&D 현장

#A사는 수요기업인 대기업, 대학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 디스플레이 장비개발 정부과제를 수주했다. 정부에서 총 35억원을 지원받아 그동안 수입에 전량 의존했던 장비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1년 정도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된 이 장비는 정부 평가를 무사히 통과했고, 수요기업에 공급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 장비는 결국 상용화되지 못했다. 당초 이 장비는 5세대(기판 규격)로 제작됐지만, 수요기업이 5.5세대로 투자계획을 선회하며 양산성이 검증된 외산장비를 도입하기로 결정하면서였다. 이로 인해 1년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B사는 모바일 관련 정부과제 수주를 위해 비교적 작은 규모의 중소업체 2곳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중소기업을 졸업한 규모 있는 업체와 손을 잡을 경우, 프로젝트 수주 자체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컨소시엄은 총 70억원의 정부자금을 받아 해당과제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컨소시엄에 참여한 업체 한 곳이 과제수행 기간 중에 부도가 났다. 또 다른 업체는 리소스 부족으로 담당했던 부품 성능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 과제의 결과물은 매출로 이어지지 못했다.



수백억 쏟아부은 R&D성과, 물거품되는 까닭은


중소기업들이 수십억원, 심지어 수백억원의 정부지원을 받아 개발한 국책과제 성과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험실 한 귀퉁이에서 사장되고 있다. 긴 시간과 상당한 돈을 쏟아 부은 결과물들이 성능과 가격 면에서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국민의 혈세만 낭비된 것이다.

◇정부과제 주제는 '안전빵' 혹은 '허무맹랑'=중소기업들은 정부로부터 과제를 수주하고 일정 기간 동안 정부로부터 자금을 원활히 지원받기 위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안정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한 디스플레이 장비회사 관계자는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사업과 제품에 도전할 경우, 위험요소(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정부과제를 많이 신청하며, 프로젝트 실패 확률을 낮추려 비교적 안정적인 주제를 제시하곤 한다"며 "이럴 경우, 수년 간 공을 들여 만든 결과물이 매출로 이어지기에는 성능과 가격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심지어 일부 중소기업들이 국책프로젝트 수행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이미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제품을 마치 새롭게 착수하는 것처럼 포장한 후 정부과제로 버젓이 신청하는 '도덕적 해이'도 빈번하다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중소기업이 추진하는 신사업 리스크를 고스란히 정부가 떠안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프로젝트로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팹리스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영국 한 업체가 전 세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모바일 프로세서 설계 아키텍처를 우리 기술로 만들자는 과제가 현재 진행되고 있고, 여기에 몇몇 중소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삼성이 사활을 걸고 집중해도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기업들은 정부과제를 수주한 후 성공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과제 목표를 낮게 설정하거나, 혹은 정부로부터 '공짜' 지원을 받기 위해 아예 수행 자체가 불가능한 과제를 소위 '국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애써 세금을 투입해 개발한 성과물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업과 학·연…협력이 오히려 독(毒)?=중소기업은 정부과제 성과를 실제로 적용해보고 또 납품까지 이어지도록 수요기업인 대기업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또 연구 인력을 폭넓게 활용하기 위해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도 컨소시엄에 포함시킨다. 수요기업과 대학, 출연연이 함께 할 경우에 과제를 수주하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수요기업이 컨소시엄에 참여할 경우, 건전한 '파트너십'이 아닌 소위 '갑을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는 "수요기업은 자신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결과물이 나오도록 프로젝트 기간 내내 중소기업에 부당한 요구를 한다"며 "수요기업이 결과물을 구입해주면 문제가 안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럴 경우 다른 수요처를 찾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대학 및 출연연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할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과제는 성공할지 몰라도, 시장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부품업체 관계자는 "대학 및 출연연과 함께 만든 결과물은 성능은 좋을 수 있으나 시장에 공급하기엔 가격경쟁력 등이 떨어져 상용화를 위한 양산(대량생산)까지 이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결국 큰 돈을 들여 대학생과 출연연 연구원들 스터디만 시켜주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할만한 기업이 될만한 R&D하도록 해야'=정부과제에 참여했던 업체 관계자들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업비 집행항목 및 관리규정 등으로 실무적인 어려움도 겪는다고 입을 모았다. 비정기적으로 요구하는 보고서도 많아 아예 정부과제를 전담하는 팀을 별도로 운영하는 업체들도 많다. 중소기업으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조병걸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 팀장은 "정부는 지원할 기업을 선정할 때 △과제를 끝까지 진행할만한 재무적인 조건을 갖췄는지, △연구진이 과제를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되는지, △과제수행 중 연구 인력 이탈이 없을 정도로 경영환경이 조성됐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 개발 뿐 아니라 상용화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업체에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팀장은 이어 "과제를 평가하는 기준도 '기술'이 아닌 '시장' 중심으로 전환돼야 하고, 수요기업들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결과물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며 "대학 및 출연연도 실험실에 갖힌 사고에서 벗어나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도록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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