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회동의 추억'… 금융지주 회장의 굴욕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2014.01.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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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깎이고 혼쭐 나고, '회장님'의 추락…"제왕적 지위,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 지적

2011년4월18일 오전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서울 뱅커스클럽에서 5대 금융지주 회장들과 조찬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2011년4월18일 오전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서울 뱅커스클럽에서 5대 금융지주 회장들과 조찬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자리 배치하는데 외교부 의전 규정까지 참고했습니다." 2011년4월18일, 금융위원회 담당 관료들은 진땀을 뺐다. 당시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사상 처음으로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불러 모았다.

당장 좌석 안배가 문제였다. 누구 하나 말석에 앉히기 어려운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행시 대선배이자 이명박 정부 일등 창업공신인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속칭 실세로 불리던 어윤대 KB금융 회장, 금융권 최고의 카리스마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등 이른바 '4대 천왕'이니, '5대 천왕'이니 하는 말들이 유효한 시절이었다.



적어도 '장관급 이상'이라는 금융지주 회장들을 한데모아 '회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석동 위원장의 존재감이 드러났다고 할 정도였다. 회동의 계기는 금융권 보안 사고였다. 현대캐피탈이 해킹당해 고객정보 175만 건이 유출된데 이어 농협의 전산망 마비사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을 때다.

2014년1월14일 오후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서울 중구 태평로 금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금융회사 고객정보 유출 관련 금융업계 대표 긴급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이기범 기자2014년1월14일 오후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서울 중구 태평로 금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금융회사 고객정보 유출 관련 금융업계 대표 긴급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이기범 기자
#그로부터 약 3년 후 2014년1월14일. 1억 건이 넘는 카드사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구멍 뚫린 금융권 보안이야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지만 당국 수장과 지주사 회장들의 회동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당일 점심시간 직전에서야 소집 사실을 지주사에 통보했다. 간담회를 불과 세 시간여 앞두고서다. 일부 관료들조차 "혹시 회장들이 못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 기우였다. 단 한명 불참자 없이 일제히 모였다.

신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사고가 발생하면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각오를 하라"고 호통을 쳤다. 과거에 불러놓고도 행여 실수라도 할까 자리 배치에 전전긍긍하던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금융지주사 회장들의 '굴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금융감독원의 지도아래 연봉이 40%가량 삭감될 처지다.


신한, 국민, 하나금융 등 주요 지주사들은 고액 연봉 논란에 휘말려 회장 연봉(기본급과 장·단기 성과급 포함)을 약 40% 깎겠다는 방안을 금감원에 전달했다. 한 지주사 관계자는 "처음에 30% 삭감안을 내밀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말했다. '자율적 조정'이라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강제다. 군사정권 때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일련의 사건들은 '비정상'에 가깝다. 뒤늦게 금융권 대표 CEO(최고경영자)들을 예고 없이 호출해 으름장을 놓는 일이나 민간 금융회사 회장들의 연봉을 일제히 깎자고 달려드는 것 모두 정상적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 여론이 거의 없다. 보수를 대폭 삭감한다고 해도 금융지주 회장들이 챙기는 연봉은 여전히 10억원을 훌쩍 넘는다. 개인정보 유출, 횡령, 불법대출 등 온갖 금융사고가 터져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회장도 없다. 하는 일에 비해 과도한 보수를 받고 휘두르는 권한보다 짊어지는 의무가 턱없이 가볍다는 게 싸늘한 여론의 시선이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민간 금융회사가 정당한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 민간답게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경영을 펼쳐야한다"며 "위험을 감수한 도전은커녕 이자수익 90%에 '땅 짚고 헤엄치기'로 장사를 하면서 안주하는 한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어쩌면 지나치게 막강했던 지주사 회장의 지위와 연봉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뜻 비정상처럼 보여도 현실을 따져보면 '비정상의 정상화'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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