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테헤란로 갈래길이 무려 115개" 새 도로명 혼란

머니투데이 이창명 이동우 신현식 기자 2014.01.0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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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신고 소방관도 큰 혼란…"달동네는 도로명 주소 어떻게?"

갑오년 새해 1월1일부터 도로명주소가 법정주소로 전면 사용된다. 안전행정부는 지난 2011년 7월29일부터 기존 지번주소와 병행해 사용해온 도로명주소를 1일부터 전면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모든 공공기관에서는 도로명주소로 업무를 처리하며, 전입·출생·혼인·사망신고 등 민원 신청시 도로명주소를 사용해야 한다./사진=뉴스1갑오년 새해 1월1일부터 도로명주소가 법정주소로 전면 사용된다. 안전행정부는 지난 2011년 7월29일부터 기존 지번주소와 병행해 사용해온 도로명주소를 1일부터 전면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모든 공공기관에서는 도로명주소로 업무를 처리하며, 전입·출생·혼인·사망신고 등 민원 신청시 도로명주소를 사용해야 한다./사진=뉴스1


첨단 IT기업들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삼성역을 거쳐 삼성교까지 동서로 4km에 걸쳐 뻗어있다. 높은 빌딩 숲 사이사이 복잡한 갈래길에 식당가와 유흥가가 자리잡고 있다.

새 주소체계에 따라 일대의 복잡한 갈래길에는 모두 '테헤란로 ○길'이라는 주소가 붙었다. 강남역 인근 이즈타워 옆길에서 시작된 '테헤란로 1길'부터 삼성교 앞 강남소방서 옆길 '테헤란로 115길'까지 비슷한 주소가 반복된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소방관은 "워낙 길이 많다보니 '테헤란로 ○길'이라고 신고를 받았을 때 한 번에 파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그많은 테헤란로 갈래길을 다 어떻게 외워야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된 지 이틀째인 3일 만난 일선 현장 근무자들은 새 주소체계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주소체계에 적응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새주소 얘기 꺼내자 한숨만 "달동네는 어쩌라고…"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한 일선 지구대에서 만난 경찰관은 도로주소명 얘기를 꺼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성내2동은 달동네 같은 곳이라 길이 복잡한데 도로명 주소로 표현이 어려워 보인다"며 "이런 도로명주소 체계는 계획도시 같은 곳에나 어울리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경찰과 소방 모두 아직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 두 가지 주소를 함께 표기하는 편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로명주소만 사용할 경우 범죄나 화재신고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신속하게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소방당국 관계자는 "도로명 주소는 도로명 하나가 기존 주소로 표현할 경우 기존 주소체계의 3개 동에 걸치는 경우도 있다"며 "도로명 주소는 범위가 너무 넓어 사고지점을 알아내야 하고 작은 길 하나하나 이름이 붙어 적응이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지구대 관계자는 "현재 신고를 받으면 지구대의 컴퓨터 화면이나 순찰차 내부의 모니터 화면에 구 주소와 도로명 주소가 함께 표시된다"며 "도로명 주소만으로 신고지를 찾으려면 불편함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행정부는 지난 2011년 7월29일부터 기존 지번주소와 병행해 사용해온 도로명주소를 1일부터 전면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모든 공공기관에서는 도로명주소로 업무를 처리하며, 전입·출생·혼인·사망신고 등 민원 신청시 도로명주소를 사용해야 한다.

◇유통업계 "업무효율 하락" 불만

이날 유통업계에 따르면 옥션과 11번가, 인터파크 등 오픈마켓 고객 중 도로명주소를 사용하는 비중은 전체 배송물량의 1%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에 맞춰 시스템을 개편했지만 아직은 일선 택배기사나 고객들에게 도로명주소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강동구의 한 택배영업소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진선미씨(36)는 도로명주소의 비효율성을 꼬집었다. 그는 "고객이 지번으로 이야기하면 전산에서 새 도로명으로 바꿔 일이 늘었다"며 "이를 다시 택배기사들에게 지번주소로 고쳐서 전달하는데 사실상 전산 상에서만 새 도로명이 존재하는 셈"이라고 털어놨다.

명절 선물배송을 눈앞에 둔 백화점과 대형마트도 도로명주소에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마트 배달원 홍모씨(60)는 배달을 위해 내비게이션에 도로명주소를 입력했다 낭패를 겪었다. 내비게이션이 새로 시행되는 도로명주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일방통행로에 들어섰기 때문. 홍씨는 "물량이 많아 마음이 급했는데, 앞뒤로 차가 따라 들어오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며 진땀을 뺐다.

30년 동안 배달업무를 해왔다는 홍씨는 "차라리 기존주소 체계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지금보다 백배 낳았을 것"이라며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고 정부정책을 비판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배송기사들이 도로명주소를 어려워 해 최근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를 함께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으로 대거 교체했다"며 "배송물량이 급증하는 설 기간 중 오배송사고가 잇따라 나올 수 있어 도로명주소를 아예 지번주소로 변경해 주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정부가 도로명주소 전면시행에 의지를 보인다 해도 민간에서는 기존 지번주소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시스템 개발과 운영비 부담이 생기더라도 오배송에 따른 반품이나 교환을 고려하면 지번주소를 유지하는 것이 한결 낫기 때문이다.

어색한 도로명이 가장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회사원 박모씨(36)는 "일단 도로명이 생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어디에서 온 이름인지 모르겠고 동네와 전혀 관계없는 작위적인 이름이 많아 입에 잘 붙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로명주소 "올바른 방향" vs "기존 정서 허물어 혼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도로명주소가 빚은 혼란을 사이에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수기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현재 지번주소 체계는 번지라는 정보를 지도에 매칭시키는 과정이어서 관리가 어렵다"며 "하지만 도로명주소는 그 자체가 지도에 그대로 들어맞아 지리정보시스템 등에서 관리가 쉽고 훨씬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우체국 집배원들도 오랜 기간 일한 사람들이 기존 주소 체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처음부터 도로명주소를 접해본 사람들은 오히려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서구식 주소 체계는 기존의 동(洞)이 사라져 우리나라 정서와 맞지 않는다"며 "최근 지역공동체, 마을 등 지역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추세에 동 체계를 허물고 생소한 길 개념으로 가는 것은 섣부르다"는 의견을 내놨다.

혼선을 줄일 대안으로 이 교수는 "기존 주소체계에 유예기간을 좀 더 두고 적응할 기간을 둬야 한다"며 "동 같은 행정단위까지 없앨 필요는 없다고 보고 도로명도 지역성에 기반을 두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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