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에 성공하고 이를 전격 발표했다. 철통 보안의 비밀 작업 끝에 내놓은 기습적 선언이었다. 백성들에게 쉬운 언어를 선물하겠다는 왕의 결단이었지만 조정은 들끓었다. 한자 체제 아래에서 오랜 세월 단단하게 '굳히기'를 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었다.
세종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너희는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이두를 만든 설총은 옳다하면서 자기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느냐." 사실상 읍소다. "너희들은 글에서 언문을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에 그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그러하냐? 내가 산이나 들로 다니며 매사냥이나 하고 있다면 모를까. 너희들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창조경제가 화두가 된 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일단 그 깃발은 올려졌다. 창조경제의 전도사로 불리는 윤종록 미래창조과학부 제 2차관은 창조경제의 '역할 모델'로 떠오른 이스라엘을 알리느라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의 강연에서 단골처럼 나오는 메뉴는 이스라엘의 '후츠파 정신'. '주제넘은, 뻔뻔스러운, 놀라운 용기'를 뜻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정부와 기업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이슈가 생기면 아래 위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한 판 토론을 벌인다는 것이다.
윤 차관이 이스라엘 경제성장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번역한 '창업국가'란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1986년에 PC 기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칩386을 만들어낸 주인공인 인텔 이스라엘팀이 소개된다. 미국 본사도 못한 큰 일을 해낸 이스라엘팀의 회의 방식은 미국인 동료들도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다들 목소리를 높인 터라 얼굴이 불그스레해서 나오는 데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아주 좋은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라는 답을 듣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서도 타협을 볼 줄 아는 게 후츠파 정신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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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의 현주소는 이 후츠파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든 기업이든 '높은 윗사람'이 주재하는 회의에선 아랫사람은 대부분 수동적으로 메모하는 모습만 보일 뿐 대놓고 윗사람에게 반대 의견을 표시하거나 동료들끼리 고성의 논쟁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게 국무회의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얘기한 세종 재위 기간이 훨씬 '후츠파지수'가 높아 보인다. 왕조시대에 논쟁이 더 활발하고 민주주의 시대엔 묵언의 메모만 볼 수 있는 모순. 이건 민관 누구든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후츠파는 둘째 치고 속된 말로 최소한 '후덜덜'은 아닌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숨을 쉴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창조경제의 틀을 쌓겠다는 정부가 먼저 앞장서 민간에 보여줘야 하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