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생전 못 피웠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꽃', 활짝 피다

머니투데이 황보람 기자 2013.08.13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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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인액터스 '블루밍 프로젝트 팀'…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심달연 할머니 2005년 작품 '안뜰'/사진제공=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심달연 할머니 2005년 작품 '안뜰'/사진제공=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할머니는 한지에 꽃을 꼭꼭 눌러 그림을 그렸다. 할머니 손끝에서 꽃들은 평화로 피어났다. 고향 한옥집 꽃밭을 생각하며 만든 '안뜰'에는 안개꽃이 무리지었다. 할머니는 '내가 새라면 그곳에 가고싶다'고 했다. 전쟁이 없는 곳으로.

1940년 쯤인가. 13세였던 심달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그대로 버려졌다.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기억마저 잃었다. 수십년을 떠돌다 고국땅에 돌아와서도 온전히 살지 못했다. 원예심리치료만이 할머니의 안식처. 2010년 12월. 84세로 심달연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심달연 할머니 압화 작품. 왼쪽 상단부터 차례로 '전쟁', '친구가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아요',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사진제공=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심달연 할머니 압화 작품. 왼쪽 상단부터 차례로 '전쟁', '친구가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아요',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사진제공=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Blooming their hopes with you. 소녀의 꽃, 함께 피우다.

2013년 삼일절. 할머니의 꽃이 다시 피어났다. 사회적 약자들의 자립을 돕는 모임인 고려대학교 '인액터스'가 할머니들의 꽃작품을 가방으로 되살렸다. 인액터스는 2009년 '블루밍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난해부터 '윤리적 소비'를 토대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고 있다.



블루밍 팀은 대구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을 프로젝트를 함께할 친구로 정했다. 낮은 인지도로 별다른 후원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압화작품을 만드는 꽃할머니들이 계셨다.

돌아가신 심달연 할머니와 김순악 할머니는 꽃 작품을 만들며 상처를 치유했다고 했다. 청년들은 할머니들의 작품을 모티브로 '희움백'을 제작하기로 했다. 소녀 시절 못 다 핀 할머니들의 꽃이 작품 속에 살아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할머니들이 예술작품을 통해서 상처를 이겨내시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았어요. 압화작품을 그대로 사용해서 제품을 만들면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들이 예쁘고 감동스러웠어요" (진세은)


가방 하나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다. 디자인에 쓸 압화작품을 고르고 공장 수십 군데를 발로 뛰는 것 모두 블루밍 팀의 몫이었다. 알음알음 소개 받은 이현지·하성아·윤태선 디자이너가 손발 벗고 도왔다.

심달연, 김순악 할머니의 압화작품을 모티브로 만든 희움백./사진제공=희움 홈페이지(www.joinheeum.com)심달연, 김순악 할머니의 압화작품을 모티브로 만든 희움백./사진제공=희움 홈페이지(www.joinheeum.com)
프로젝트가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희움백 출시를 앞두고 판매량을 예상에 의견이 갈렸다. 블루밍팀은 1000개를 팔겠다고 나섰지만 시민모임은 250개도 무리라고 봤다. 재고가 쌓일 위험이 있는 만큼 무턱대고 만들 수도 없었다. 1년 전 '순수백'이란 이름으로 출시한 가방도 고배를 마신 터였다.

"다 못 팔면 길거리에 나가서라도 팔려고 했어요. 250개만 팔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분만에1000장 넘게 주문이 들어왔어요. 진짜 대박이었죠" (김만희)

할머니들의 꽃작품은 무엇보다 '상품성'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돕는다'는 마음보다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희움백을 주문했다. 수익금은 모두 대구 경북지역 위안부 피해자 복지와 역사관 건립 기금 등에 쓰인다.
고려대학교 동아리 '인액터스' 블루밍 프로젝트 팀. 가운데 김만희(23) 팀장.=/사진제공=블루밍 프로젝트 팀고려대학교 동아리 '인액터스' 블루밍 프로젝트 팀. 가운데 김만희(23) 팀장.=/사진제공=블루밍 프로젝트 팀
◇ 서버 폭주 '양요섭 사태'

3·1절과 8·15가 되면 의식팔찌와 가방이 꽤 팔렸다. 하지만 '서버폭주', '사이트 다운', '품절'에 이르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지난 달 가수 양요섭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의식팔찌를 차고 나온 것. 블루밍 팀은 이를 '양요섭 사태'라고 불렀다.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문의전화 받고 게시판에 댓글 달고 손이 모자랐어요. 계속 주문을 받으면 도저히 감당이 안될 거 같아서 아쉽고 죄송하지만 모두 품절 상태로 두고 차례로 배송하고 있습니다" (김지은)

의도치 않은 '연예인 협찬' 덕에 실시간 검색어 1위에도 오를 정도로 블루밍 프로젝트는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하지만 블루밍 팀 10명 남짓과 대구 정신대 시민모임 2명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사태를 해결하는 데 대구 시민모임이 중심을 잡았다. 16년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우면서 쌓인 내공은 청년들의 열정보다 컸다. 시민모임은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해 양요섭 사태에 대응하며 고객관리와 배송 등 실질적인 업무를 도맡았다.

블루밍 팀은 "이제 절반 정도 온 것 같다"고 했다. 블루밍 프로젝트 전반을 대구 시민모임에 온전히 넘기고 나면 이들의 임무도 끝난다. 아직 3년 반은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희망은 이미 피어나고 있었다.

"예전엔 저도 솔직히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 넘지 못했어요. 할머님들을 뵙고 하면서 그걸 뛰어넘는 평화의 소중함을 배웠어요. 국사책으로나 배웠지 누가 관심 있을까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 걸 보고 우리 사회가 믿을만하다고 느꼈습니다" (정현민)

블루밍 프로젝트는 오는 15일 '신상 파우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여느 때처럼 팀원들은 긴장과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일이 커지면 책임 져야 하는 부분도 많아져서 아무래도 밤에 잠을 못자요. 신상 나올 시기가 되면 잠을 설치죠. 새로 나오는 제품들도 많은 사랑 받았으면 좋겠어요. 서버가 다운 되더라도요" (김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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