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이 이 영화에 이토록 열광케 했을까. 뛰어난 작품성과 배우의 열연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힐링'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특히 굴곡 많은 인생의 얘깃거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 온 이 땅의 40~50대가 장발장의 고단한 삶을 통해 삶의 의지를 발견하며 위로받는 것이 아닐까.
자베르 경감의 회한과 마리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게 장발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즉 진실이 편견의 굴레를 벗기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존중 받아 마땅한 그들의 소중한 인생은 이미 흘러가 버린 후다. 이렇듯 편견은 진실을 가리며, 내가 가진 기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자기규범의 폭력을 행사한다. 사회적으로 규합할 경우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특히 무서운 건 당하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조차 힘들다는데 있다. A형은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음을 어찌 입증하겠는가. 이토록 무시무시한 우리 속의 괴물, 편견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세상을 제대로 올바르게 보고 진실과 마주하기 어렵다.
230년 전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북경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 것이 적은 자는 백로만 보았을 경우, 처음 보는 까마귀를 비웃는다. 오리만을 보았을 경우, 처음 보는 학의 자태를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스스로 아무런 괴이함이 없건만 자기 혼자 화를 내며, 하나라도 자기가 본 것과 다른 사물이 있으면 만물을 다 부정한다." 장자는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설명할 수 없고, 여름철 곤충에게는 얼음에 대해 설명할 수 없으며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도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을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보며 삶 그 자체와 제대로 마주할지, 아니면 연암이 말한 '본 것이 적은 자' 혹은 장자가 말한 '우물 안 개구리' '여름철 곤충'으로 편협하게 살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렸다.
엊그제 그룹 울랄라세션의 리더 임윤택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 언론은 그가 마지막까지 '위암'과 '악플', 이 두 가지와 싸워야 했다고 보도했다. 숱한 좌절을 딛고 꿈과 열정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마저 마지막까지 편견과 싸워야 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 편견에 갇힌 사람에게 논박이나 설득을 할 수도 없다. 때문에 "악플도 그들의 자유니 그냥 놔두라"고 했다는 임씨의 말은 지혜롭다. 치열하게 살다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