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호의 체인지업]비운의 투수 박동희에 이어 조성민 마저

머니투데이 장윤호 스타뉴스 대표 2013.01.1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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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조성민 ⓒ사진=임성균 기자 ↑ 고 조성민 ⓒ사진=임성균 기자


2010년 12월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해 3월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저자 이의수)’가 책으로 나왔다. 청춘은 아프면 아파할 수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40대는 가족에 대한 책임과 주어진 일을 위해 아파도 아파할 수 없고 아파도 내보이지 못하며 묵묵히 감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6일 ‘비운(悲運)의 투수’ 조성민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뉴스에 너무도 많이 등장한 그의 죽음을 설명하는 표현은 차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말이기 때문이다.



조성민이 세상을 등진 나이가 만 40세였다.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이후 엄청나게 많은 기사가 신문 TV 방송 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와 우리 사회를 어둡게 짓눌렀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그가 남긴 아들(12)과 딸(10)이었다. 2008년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모두 여읜 남매는 그 나이에 상주가 됐다.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앳된 모습이 일부 사진들을 통해 무차별 노출되는 것을 보며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특별히 가깝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랜 동안 조성민을 알고 지냈다. 동갑내기 박찬호를 취재하면서 그의 고교 시절 경쟁자였던 조성민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됐다.

동기생 조성민은 신일고-고려대 졸업, 박찬호는 공주고-한양대 2년 중퇴이다. 이 시점까지는 조성민이 박찬호보다 지명도가 높아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흔히 하는 야구 표현으로 조성민이 1~2선발 급이면 박찬호는 3선발 급이라 할 수 있다. 박찬호가 한양대를 중퇴하고 1994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 조성민은 1996년 고려대를 졸업한 뒤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훗날 조성민은 ‘박찬호가 먼저 메이저리그로 갔기 때문에 나는 일본프로야구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자신이 최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존심이 셌던 투수가 조성민이다.

일본 프로 진출 이후 조성민은 한 때 요미우리의 선발 투수로 1998년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으나 1999년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야구 밖의 삶에서도 비극이 겹치며 그는 끝내 비운의 야구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전 국민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슬픔에 과연 야구계는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자극적인 표현과 기사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고인을 애도하며 진심이 담긴 추모의 뜻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모았는지 의심스럽다.

지난 2007년 3월22일 조성민의 고려대 선배였던 박동희가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조성민과 같은 우완 정통파에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이다.

↑ 고 박동희 ⓒ 사진= 롯데자이언츠 제공↑ 고 박동희 ⓒ 사진= 롯데자이언츠 제공
부산고를 졸업한 박동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 최고 대우로 고향팀 롯데에 입단해 1992년 한국시리즈 MVP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무릎 등의 부상이 악화되면서 2001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쓸쓸하게 접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 영업을 마치고 새벽 3시경 귀가하다가 사고를 당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공교롭게도 박동희가 세상을 떠난 2007년 롯데의 사령탑은 강병철 감독이었다. 강감독이 1992년 빙그레(현 한화)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의 MVP가 2승1패를 기록한 박동희였다.

박동희는 김용희 감독 첫해인 1994년31세이브를 올려 마무리 투수로도 최고의 실력을 보여줬다. 박동희는 1997년 6월 삼성으로 트레이드됐고 배번도 늘 자신의 것이었던 21번에서 48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고향 부산과 롯데를 떠난 그는 더 이상 시속 150km를 오르내리던 패스트볼을 던지지 못했다. 롯데도 박동희의 전성기였던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2007년 3월 박동희의 사고 당시 미국 특파원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필자는 프로야구 시즌 개막을 기다리며 롯데는 물론 한국야구계 전체가 페넌트레이스 대장정을 시작할 때 그의 순수했던 야구혼(魂)을 추모해주기를 기대했는데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메이저리그에서는2007년 4월3일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탬파베이의 개막전에 앞서 2006시즌 후 뉴욕 맨해튼에서 비행기 충돌 사고로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뉴욕 양키스 투수, 코리 라이들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대형 화면에 코리 라이들을 추억하는 비디오가 상영되는 가운데 미망인 멜라니와 6세의 아들 크리스토퍼 리들이 시구를 해 구장을 가득 메운 5만5035명의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슬러거였던 데이비드 오티스는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개막전으로 2002년을 회상한다. 보스턴 구단은 그 날 펜웨이 파크의 스크린에 고인이 된 데이비드 오티스의 어머니 사진을 비춰주었다. 아들과 함께 프로야구 개막을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마음을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가슴에 전한 것이다.

스포츠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은 슬픔까지 함께 나누는 ‘감동(感動)’이다. 2013년 새해 한국 스포츠가 잊혀져 가고 있는 감동을 선사해주고 비운의 야구인 조성민을 추모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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