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병으로 인한 죽음의 목전에서 받는 고통에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때엔 그렇게 자존감이 무너진다는 사실 자체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다.
예전 어느 설날 무렵이었다.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노환으로 심장이 너무 안 좋으셔서 막 입원하셨다. 거동조차 힘드셨다. 사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외할머니 곁을 지키던 이모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대신 그날 엉겁결에 대신 수발을 했다.
하지만 심장에 무리가 갔다. 물을 달라고 하셔서 드렸는데 한 모금 드시더니 조금 후 의식을 잃으셨다. 의사를 급히 불렀다. 의사는 이리저리 해보더니 중환자실로 옮겨 산소 호흡기를 달았다.
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아무르>는 제목처럼 노부부의 사랑에 관한 헌사이자, 존엄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미 칸에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거장 미카엘 하네케가 감독했다.
영화엔 실제 80대인 노배우들이 출연한다. 반신마비와 치매가 온 아내를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다. 남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이기 싫어 병원에 보내지 말라는 아내의 요청을 남편은 끝까지 들어준다. 남편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아내의 자존감을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끝내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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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고, <타임>지가 뽑은 '2012년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내년 1월 예정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남편의 무덤한 표정과 눈빛엔 아내와 함께 보낸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삶의 자취는 이 노부부의 깊게 패인 주름에 오롯이 묻어 나온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삶의 단계별로 여러 형태와 종류가 있을 텐데, 그 중에서도 상대와 약속을 지켜내고 이를 통해 상대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내 생명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니 나부터 누구에겐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렇게 사랑하다 간다면 후회는 없을 것 같다. 함석헌님의 시구가 머리를 스친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족. 이 영화 내용을 설명하는데 별 의미가 없다 여겨 별도로 언급은 안 했지만 그래도 소개는 해야 하겠다. 남편 조르주 역할을 맡은 노배우는 사랑 영화의 고전 '남과 여'의 주인공인 장 루이 트랭티냥이다.
할머니 안느 역은 누벨바그의 고전 <히로시마 내 사랑>의 주연 에마뉘엘 리바가 맡았다. 긴 세월 속에서 멋진 신사는 온화한 할아버지가 됐고, 아름다웠던 여인은 고고한 할머니가 됐다. 이 두 노배우는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연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