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조' 가계부채, 경제민주화보다 급하다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12.10.2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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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사 채무재조정 정부 재정투입, 빚의 악순환 끊어야

"가려운 곳 긁으면 시원하죠. 정작 몸 속 병든 곳이 얼마나 곪아가고 있는지 모른 채…"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게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계층은 생활도 못하는데 빚을 어떻게 갚아요. 탕감을 포함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한 전직 관료는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 이같이 우려했다. 그는 "생색내는 것은 쉬우니까 모두가 떠들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는 슬슬 피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우리 경제의 최대 취약점인 가계부채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경제민주화'만 외치고 있다.

'1000조' 가계부채, 경제민주화보다 급하다


대선 후보들이 '가계 부채 1000조' 문제를 주요 이슈로 다루지 않는 것은 해법이 쉽지 않고 실제 '득표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1000조원 가운데 50% 남짓이 집 때문에 생긴 빚(주택담보대출)이다. 나머지의 절반가량도 토지, 농지, 건물 등을 담보로 하고 있다. 부동산에 묶인 대출이 700조원 남짓 된다. 이를 제외한 게 신용대출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가계부채의 대부분이 주담대와 맞물려 있어 어느 순간 '가계부채 = 주담대 = 하우스 푸어'로 인식돼 버렸다"고 말했다.

문제는 빚이 빚을 키우는 악순환 구조에 걸려 있다. 가계는 이자를 갚아도 빚이 늘어나는 이자수지 만성적자의 덫에 걸려 있다. 저금리 시대에 예금 이자율은 바닥이지만 대출 이자율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김광수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가 지급한 대출이자는 61조2000억원인 반면 저축이자는 30조2000억원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부동산 등 자산 가격 상승을 기대할 상황도 아니다. 가처분 소득 증가도 기대하기 힘들다. 지난해 가계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09.6%로 1년 전보다 6.2%포인트 높아졌다. 그만큼 빚을 감당할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의 한 축인 소비부분이 위축돼 근로자가구의 소비지출 증가율은 지난해 0.83%에 불과했다. 민간 소비가 줄면 성장이 위축되고 저성장은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에 빠졌다.

이 때문에 문제를 더 키우기 전에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재정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다. 금융회사의 자율적 채무재조정에 덧붙여 정부의 보증과 이에 따른 이자 감면까지 검토해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한 금융권 인사는 "외환위기 이후 극복 과정에서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다보니 가계가 짐을 짊어졌다"며 "15년 정도 지난 시점에 재정이 가계 구조조정을 선제적으로 돕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 만기 연장, 이자 감면 등 여러 지원책을 만드는 것처럼 취약 계층의 채무 조정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지원의 주축이 된 신용보증기금의 사례를 벤치마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해외에서도 위기 때마다 맞춤형 조정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해 온 사례가 적잖다.

하지만 대상의 불명확성, 도덕적 해이 등 문제점을 지적하는 반론도 만만찮다. 현 시스템으로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햇살론, 미소금융 등 서민 지원책은 물론 금융회사의 자율적 채무 재조정 프로그램이나 신용회복위원회 등 여러 제도가 마련돼 있다는 주장이다.

가계부채를 금융 문제로 국한시키는 접근방식도 재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가계부채 문제를 축구에 비유하면 금융당국은 수비수와 골키퍼 역할이다. 지금은 공격수(일자리 창출)와 미드필더(자금 공급) 역할까지 주문하는 모양새다. 전체를 총괄·조율하는 감독의 전략·전술도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치권도 자극적인 이슈인 경제민주화에만 매달리지 말고 '가계 빚'과 관련해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가고 현실적 대안을 찾아야할 때"라며 "고통스럽겠지만 정부, 금융회사, 채무자 등이 비용 부담을 논의해 가는 게 시한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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