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을 받고…

머니투데이 김영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2012.10.0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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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 120만원에 한달 살기-7 : 가을소풍에 펑크 난 가계부

연락 늦어서 미안 / 20일 아버지 별세 / 00병원 3호실 / 발인 22일 오전 7시 / 신경 안 써도 되네. 알고만 있게 / 000

친구에게서 부음 문자가 왔다.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사이. 가는 게 좋겠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누구가의 부음을 받으면 속으로 생각한다. 가야 하나? 안 가면 안 되나? 안 가면 나중에 뭐라 하나? 얼마를 해야 하나? 나는 고인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부음을 보낸 분의 상심을 떠올리지 않는다.



시골로 와서도 도시의 부름이 많았다. 몇 건의 결혼식과 부음이 있었고, 이런저런 모임도 있었다. 다 챙기려면 한 달에 한두 번은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거의 다 건너뛰고 지냈다. 오로지 시골에 멀리 있다는 이유로. 그래도 개운치 않은 경우가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관계적 소비’에 잔뜩 낀 거품



나는 '행사' 체질이 아니다. 어떤 행사든 별로 내키지 않는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동창회든 잘 가지 않는다. 왁자한 사교 분위기가 불편하다.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다.

사실 이런 자리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서로 아는 척 하기도 좋고, 모르는 척 하기도 좋다. 여럿이 어울리기도 좋고, 단 둘이 속닥이기도 좋다. 용건을 슬쩍 건네기도 좋고, 슬쩍 피하기도 좋다. 共과 私를 섞기도 좋고, 나누기도 좋다. 잠깐 있기도 좋고, 몇 시간 눌러 있기도 좋다. 서로서로 적당하게 움직이면 그만이다. 올 때도 적당히, 갈 때도 적당히. 각자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서. 덕분에 잊지 않고 산다.

다들 좁은 일상에 갇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이런 식의 사교도 필요해졌다. 아니 아주 중요해졌다. 한 번에 수십, 수백 명을 만나 인간관계를 다지는 네트워크 비즈니스! 객들은 바쁘다.


주인과의 용무는 얼굴을 살짝 비치는 것으로 끝이다. 봉투를 건네며 나는 본전 생각을 한다. 언젠가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받으려고 주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다. 내 아들의 결혼식에 당신은 와야 한다. 내 아버지의 장례식에 당신은 와야 한다. 꼭 와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해 주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트고, 우의를 다지며 사는지 연출해 주어야 한다. 내가 당신을 위해 그랬듯이.

나는 이런 것들이 싫다. '관계적 소비'에 잔뜩 낀 거품이 싫다. 축하든 위로든 안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가짜다. 식장에 갈 때마다 나는 내 마음이 가짜라는 것을 안다. 축하하고 위로하는 심정이 메마른 나를 본다. 남의 일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 내 일에만 매달린 나를 발견한다.

시골로 와서는 마음뿐 아니라 봉투도 문제다. 한 달에 120만원으로 사는데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건넬 여유가 없다. 5만원, 10만원이 매우 크다. 그를 떠올리며 지금 그가 읽으면 좋을 만한 책을 한 권 골라 보낼까 싶은데 여태 생각뿐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내 행사를 염려한다. 내 안에 주지도 않고 받으려는 심보가 숨어 있다. 하지만 그게 통할까? 힘도 없고, 백도 없고, 평소에 베푼 것도 없는 시골 백수에게 누가 올까? '큰일'도 현직에 있을 때, 잘 나갈 때 치러야 흥하지 않던가?

그래도 내 장례는 부디 염려들 마시길. 아주 가까운 친지만 와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치르기를. 그 숫자가 이삼십 명을 넘지 않기를. 내가 장례비용도 꼭 남겨 놓으리라. 그렇다면 아들 결혼식은? 아버지 장례는? 그것도 똑같이 해야겠다. 조용히! 조촐히! 그 자리에 빠지면 정말 섭섭하실 분만 모셔야겠다. 진심으로 마음이 나는 분만 오시게 해야겠다. 그 자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서로에게 흠이 되지 않을 분만 모셔야겠다. 그 외의 분들에게는 나중에 알려만 드려야겠다. 내 마음을 읽고 배려해 준 친구처럼. '신경 안 써도 되네. 알고만 있게'라고 하면서!

◆추석비용 1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9월에는 추석이 있었다. 차례와 선물 비용을 합해서 30만원을 썼다. 예전에는 100만원 넘게 썼지. 차례로 40만원, 선물로 30만원, 여기저기 용돈으로 50만원을 쓰면 120만원이다. 미리 만원권이나 오만원권 새돈으로 50만원을 바꾸면서 기분을 내곤 했다. 그 때는 들어오는 선물도 많더니 이젠 잠잠하다. 공연히 받는 부담이 없어서 개운하고, 그래도 못 받아서 섭섭하다. 넉넉한 그 시절 가고 빠듯한 명절을 맞는다.

선물은 아버지께만 비싸지 않은 것으로 보내드렸다. 차례 상은 더 간소하게 한다. 가짓수를 줄이고, 양은 한두 번 먹을 정도만 한다. 밤은 줍고, 대추는 따서 차례 상에 보탠다. 나물도 몇 가지는 산이나 밭에서 거둔 것이다. 거품을 싹 걷어낸 친환경 한가위 차례 상!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든다. 더 진심이다. 조상님들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들 용돈은 조금 주고 싶은데…. 궁리하던 차에 공돈 10만원이 생긴다. 지난해 집 지으며 전기공사를 할 때 10만원을 더 받았다며 뒤늦게 돌려준다. 굿~ 이 돈은 가계부에 적지 않고 그대로 아들에게 준다. 궁하면 통하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9월은 수지를 맞추기 어렵다. 아름다운 가을날, 햇살 가득하고 바람 소슬한 날! 가만있지 못하겠다. 가계부 숫자만 두드리면 안 되겠다. 동생과 오봉산 넘어 청평사도 가고, 해산 넘어 평화의 댐도 가고, 사창리 지나 감성마을 이외수 문학관도 간다. 햇살 받고 바람 가르는 드라이브가 상큼하다. 커피 내려서 담고, 과자 챙기고, 토스트 굽고, 과일도 싸 간다. 소풍 비용은 딱 기름값 만큼이다. 남들은 여행할 때 없는 시간을 내지만 나는 없는 기름 값을 낸다. 그럼 공평한가? 나야 없는 기름 값 말고 돈 한 푼 안 드는 걷기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더 유리한 것 같다.

자동차 환경개선부담금 4만원이 나왔는데 10월2일까지 내라고 하니 10월로 넘긴다. 오피스텔 두 채에 대한 재산세 토지분은 21만20원이 나왔다. 지난 7월에 나온 주택분 45만5180을 합하면 66만5200원이다. 오피스텔 세금 건은 주택분의 경우처럼 따로 계산한다. 이렇게 해서 9월엔 내가 75만8000원, 동생이 50만1000원을 쓴다. 총지출 125만9000원. 5만9000원 적자다. 정말 자동차 기름 한 번 더 넣은 만큼, 가을 소풍 비용만큼 적자다. 나는 이 결과에 만족한다. 명절 잘 치르고, 기분 내며 쏘다니고…. 부족함 없는 9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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