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인 조 회장은 동서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할 생각으로 태권도 사범 자격증을 준비해 갔지만 당시 가져간 돈은 브루클린 빈민가에 겨우 셋집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조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이어들을 찾았고 결국 6개월 만에 주문을 받아냈다. 기쁨은 곧 큰 시련으로 모습을 바꿨다. 한국에서 생산한 가죽모자가 미국까지 오는 동안 곰팡이에 뒤덮인 것이었다. 바이어는 당장 20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조 회장은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정면돌파'를 택했다"며 "바이어를 찾아가 '수중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만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담보물로 영주권과 가족사진을 맡겼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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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진심을 느낀 바이어는 조 회장에서 재기의 시간을 줬다. 빚더미에 앉은 조 회장을 살린 것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당시 모자는 앞면이 높은 크라운 스타일은 인기가 없다는 것은 정설이자 전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정관념을 뒤집어 '프린팅 모자'를 내놓았다. 앞면을 높게 하고 그곳에 기업로고 등을 새기는 새로운 시도였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모자 사업은 1990년대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1990년 미국이 모자 쿼터제를 폐지하면서 값싼 중국 제품이 홍수처럼 밀려든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역발상의 아이디어로 위기를 극복했다. 모자 원단을 스판덱스로 하고 둘레를 탄성이 있는 밴드로 처리해 사이즈 조정이 불필요한 모자 '플렉스핏'을 개발했다. 플렉스핏은 우수한 경쟁력을 인정받아 나이키 등에 독자 브랜드로 납품을 시작했다. 나이키가 자사 매장에서 다른 브랜드를 공인해 준 것은 듀폰의 고유 소재인 '라이크라'와 플렉스핏이 유일했다.
조 회장은 특히 세계한인무역협회 9대 회장을 맡으며 한상 네트워크 활성화에 불을 붙인 주역이기도 하다. 지난 1998년에는 자비로 직접 전 세계를 발로 뛰며 한상들을 조직해 한인무역인 총회 개최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조 회장은 "유대상인들과 중국 화상(華商)의 네트워크와 파워가 곧 이스라엘과 중국의 국력과 이어진다"며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지 한상들과의 기술제휴 및 합작투자 등 한상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