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여도 좋다…'명품'이니까

머니위크 배현정 기자 2012.02.2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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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명품앓이' 대한민국/'중고 명품 매장' 찾아가보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2월14일 오후 6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대한민국 부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고급 매장이 즐비한 곳에 '중고(中古)'라는 간판을 내건 매장들이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웬만한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당포'도 대로변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언뜻 부촌(富村)과 어울리지 않는 중고(전당포) 시장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곳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바로 '명품(名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고 명품 매장은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명품을 대중화한 일등공신. 서울 압구정 일대에만 이러한 중고 명품 매장이 30여 개나 들어섰고, 전국적으로는 100여 개가 훨씬 넘는 중고 명품 매장이 성업 중이다.

◆ 중고 명품 시장 매년 쑥쑥, 1조원 규모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한 중고 명품 매장. 은은한 실내조명 아래 아늑하게 단장한 공간이 백화점 명품 매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고급스럽다. 매장 곳곳에는 최신 샤넬, 에르메스, 페라가모, 구찌, 루이비통 등 명품 가방과 액세서리를 비롯, 의류가 제각각 수십만원에서 수백(천)만원의 가격표를 달고 진열돼 있다.




사진=류승희 기자

한 20대 후반의 여성 고객은 30여 분간 매장 구석구석을 돌며 제품들을 꼼꼼히 살펴 본 뒤 루이비통 토트백을 45만원에 구입했다. 이 고객은 "돈이 많으면 백화점 명품매장에 신상품을 사겠지만, 이곳에선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명품을 소유할 수 있어 한 달에 한 번 꼴로 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값비싼 명품을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이점이 중고 명품매장의 가장 두드러진 경쟁력인 것이다. 10㎡ 남짓한 작은 중고 명품 매장의 한 주인은 "백화점 명품관에서 구입한 상품을 가격표도 떼지 않고 갖고 와도 중고매장에선 원래 가격의 50% 선에서 대개 거래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고 상품임에도 소위 P(프리미엄)이 붙는 경우도 있다. L매장 주인은 "가방 중에는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이 인기가 있는데 특히 에르메스 벌킨백은 백화점 매장가보다 150만~250만원 상당의 P가 붙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최근에는 침체된 경기 상황을 반영하듯 중고 명품 매장에도 '스테디셀러'의 인기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시계전문 중고 명품 매장의 관계자는 "한때는 롤렉스시계가 강남에선 촌스럽다고 여겨져 잘 안 찾았는데, 경기 침체로 요즘에는 다시 되팔아도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중고 명품 매장은 일반 매장에서는 충족되기 힘든 고객의 다양한 욕구와 수요를 맞춰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객이 가져 온 명품을 직접 매입하거나 의뢰한 명품을 대신 팔아주는 위탁 서비스는 기본이고, 예전 급전 창구였던 전당포가 맡았던 담보대출 등 금융기능도 갖춘 곳이 상당수다. 특히 최근에는 명품을 담보로 급전을 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명품만 갖고 있으면 신용조회 필요 없이 즉시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출 금리는 대체로 월 3.25%선. 대출 기간은 통상 1~3개월 사이로 이뤄진다. "금리가 싸진 않으니까 오래 쓰면 안되지만, 갑자기 돈이 필요한 경우 현금서비스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이 돈을 융통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한 매장 관계자는 말했다.

이러한 '다기능' 중고 명품 매장은 운영방식도 시스템화하고 있다. 전국에 12개의 직영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구구스를 비롯해 필웨이, 고이비토 등의 주요 업체들은 온·오프라인으로 회원들을 관리한다. 출장 서비스는 물론 스마트폰을 통해 어플리케이션을 거래를 즐길 수도 있다. 오픈마켓에 입점한 경우도 있다.


사진=류승희 기자

지난해 5월 중고 명품 매장인 구구스를 입점시킨 오픈마켓 11번가 관계자는 "비싼 백화점 신상 명품 대신 희소성이 높고 가격이 저렴한 중고 명품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중고 명품 시장의 규모를 1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국내 전체 명품 시장 매출(5조원)의 25%에 이르는 수준으로 '명품의 재활용 시장'의 무서운 잠재력을 보여준다. 한 대형 중고 명품 매장 관계자는 "10년 전 처음 중고 명품 시장에 진출한 이래 경기 상황에 관계없이 매년 꾸준한 성장세"라고 전했다.


■"샤넬 백, 렌트하세요"


중고 명품 시장이 확대되면서 덩달아 명품 대여시장까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고가의 명품을 정가의 3~5% 수준에서 대여해주는 '명품 대여 전문점'이 20~3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1. "올 블랙 옷이나 그레이 계열에 요 백(가방) 참 이쁘게 잘 어울려요. 세련된 퍼플이라 넘 예뻐요. 두번째 대여인데도 넘 좋았어요." (옥**님)
#2. "가방을 매주 매주 대여하는데 너무너무 조아요^^. 이번 가방은 제품도 너무 좋고 사람들마다 이쁘데요." (송**님)

명품 대여 전문 '팰리스룩(www.palacelook.com)'의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후기들이다. 3년 전 매장을 이곳의 경우 일주일 평균 최소 30명에서 많게는 60명 이상이 대여 서비스를 이용할 만큼 꾸준한 관심을 자랑한다.

이 매장은 샤넬, 에르메스, 구찌 등 명품 가방을 비롯해 까르띠에, 티파니 등 명품 시계 200여 개를 구비하고 있다. 매장가 600만원이 넘는 샤넬 핸드백은 (기본) 3일에 4만~ 15만원, 1500만원이 넘는 진도 모피코트는 15만~20만원 수준에 빌릴 수 있다.

이 매장의 박지훈 대표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대학친구들을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명품 대여 쇼핑몰을 알게 돼 3년 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며 "해마다 2배 이상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한 날, 명품 가방 등으로 예쁘게 치장하고픈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파고든 것. 박 대표는 "1년에 1~2회 있을 법한 중요한 행사를 위해 몇 백만원이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사는 것보다 대여해 쓰는 것이 합리적 소비가 아니겠냐"며 "졸업시즌이나 연말 파티가 있을 때는 특히 샤넬 가방의 예약이 줄을 잇고, 평상시에는 루이비통, 구찌 가방을 찾는 고객이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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