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은 “인간은 ‘가지고 싶은 욕망’보다 ‘이루고 싶은 욕망’이 더 본질적이다. 이룬 자는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가진 것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경제권력의 논리에 줄 서지 말 것, 이것이 그의 메시지였다. /사진=이기범기자 leekb@
이준익과의 대화는, 인터뷰가 잔인한 노동일 만큼, 체력이 달릴 만큼 길게 이어졌다. 인터뷰어로서 이렇게 재미있는 인터뷰도 처음이었다. 체력만 받쳐준다면. '대표선배가 88만원 세대에게'라는 취지에 맞게 골라서 정리해야 하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다. 지난 15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3시간여 동안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준익은 목도리를 벗자마자 "멘토라는 말이 남발되고 들불처럼 퍼지는데, 왜 그런 거예요?"라고 쏘아붙였다. "아주 교묘한 음모 같단 말이야. 멘토라는 말, 그거 굉장히 불쾌하거든." 두 번째 문장부터 반말체로 급반전했다. '대표선배'나 '멘토'나 매한가지인데, 순간 기자도 뜨끔했다.
"젊은 세대는 본능적으로 기성세대에 불신을 가지고 있거든. 인류의 미래는 살 날이 많은 사람이 선택한대로 가게 돼 있다고. 그러면 88만원세대도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게 미래지향적이란 말이지. '네가 왜 멘토야? 난 필요 없어. 난 나의 길을 갈 거야', 이렇게 멘토를 부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멘토가 되어주십사 자청하는 건 야합이라는 거지."
"김어준은 이순신이다"
13척의 아군으로 133척의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잘 보라고.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사회의 다음 스테이지를 여는 통로가 되거든. 나꼼수가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이런 역동성을 만들어낸 계기가 바로 이 스마트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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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나꼼수로 상징되는 디지털파워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날로그시대에는 광장에서 세상을 바꿨다면, 디지털시대에는 온라인광장에서 세상을 바꾼다고. 온라인광장이 바로 이 스마트폰이야." 옳다. 아이폰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냈지만, 이미 누구의 소유도 아닌 '광장'이 아닌가. 누구나 거기 와서 맘대로 놀고, 재능을 발휘하고,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주류에 줄 서지 마라"
그렇다면 과거 스테이지로 역주행하는 아날로그의 논리에 청춘을 바치는 건 내 인생도 역주행하는 것일 터. "3대 종이신문 다 합쳐봤자 200만 부가 안돼. 그런데 팟캐스트는 지금 600만이 듣거든. 그러면 누가 주류야? 최소한 40대 이하에게 기존의 주류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란 말이지." 그의 말처럼 현재 세상의 주류는 이미 과거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들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거나.
"주류가 가지 않는, 가장 좁고 허름한 곳에서, 차고에서, 소외된 곳에서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다는 거야. 그러니, 제발, 주류 시스템에 줄 서지 마라. 이 태도를 포기하는 순간 매트릭스의 스미스의 졸개가 된다는 걸 알아야 해. 네오가 될래? 스미스의 졸개가 될래?" 멘토의 논리, 아날로그의 논리, 주류의 논리에 순종하는 것, 그는 이를 시스템의 용병 백신 스미스 요원의 졸개에 비유했다.
"줄 서야 할 곳은 따로 있다"
그래도 줄은 서야 할 것 아닌가. 내 마음 거기에 두고 기꺼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새로운 성공에 줄 서는 것은 당연한데, 아직도 그것이 과거의 가치관에 머물러 있다는 거야. 정작 젊은이들은 IT창업이든, 엔터테인먼트든 그런 쪽으로 신경이 가는데, 사회는 판검사니, 의사니 이런 쪽으로 붙잡고 있다는 거지. 이미 권력이 이동하고 있는데 말이야. 어차피 이동하는 거라면 빨리 가는 게 좋잖아? 안 할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음 스테이지 주류로 이동하는 통로는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학교를 그만둬라"고 말했다. "시간 아깝지 않니? 지금 학교는 '소속'이 아니라 '구속'이야. 줄서기를 강요하는 거지. 옆을 한번 돌아보라고. 다 변호사, 의사 되겠다고 주류에 줄 서 있잖아. 안 서있는 사람 없어. 문제는 대부분 탈락하고 만다는 거야. 학교를 그만두면 자율적 생존본능의 기제가 작동하거든. 그걸 따라가면 되는 거야."
"비정규직을 부러워하는 세상, 그게 다음 스테이지"
그의 말대로라면 여야 막론하고 제시되는 비정규직 구제책, 88만원세대 구제책은 잘못됐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그건 거꾸로 가는 거야. 88만원세대를 정규직화해서 200만원세대로 만든다고 미래가 밝아질까? 더 나빠져. 더 많은 야합과 집단이기주의가 횡행할 거라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부러워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그는 기자가 사는 동네 세탁소 주인부부가 생전처음 영화를 보고, 감명 받았다는 '왕의 남자' 얘기도 꺼냈다. "장생과 공길은 광대라고. 광대는 88만원세대보다 더 하층민이야.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보면 왕이 광대를 부러워한다고. 너무 부러운 거야. 광대는 비정규직이고 왕은 정규직이잖아. 그게 아름다운 거야, 또 그렇게 될 거고."
"모차르트가 위대해, 아니면 피카소가 위대해?"
이준익은 "책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이상으로 알 수 없다. 사회의 가치, 개인의 가치관 변화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100억 있는 사람, 1억 있는 사람, 누가 부자야? 당연히 100억이 더 부자지. 그러면 모차르트가 위대해, 피카소가 위대해? 그런 거야. 문화적 가치에는 서열이 없어. 수평적이지. 그런데 경제적 가치는 서열이 있어, 줄 세우는 거야. 수직적이지. 물론 사회주의 같은 균등한 분배는 영원히 불가능해. 그래서 경제가 수직이면, 수평인 문화가 바로 잡아줘야 하는 거야. 문화가치에 대한 인식과 고민만 있어서도 경제권력이 이렇게까지 힘을 발휘하진 못했을 거야."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나은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선택에 행복하고, 상대 선택을 존중하는 것, 그는 이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마침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 합니다." 끊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딱 5초. "KBS 지식 무슨, 강의해달라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강연이야. 강연은 폭력이거든. 성공스토리, 고생스토리? 그것도 다 폭력이야. 고생을 팔아먹는 짓, 절대 하면 안돼. 왜냐고? 그러면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더 성공했어야 할 것 아냐. 그런데 나보다 더 고생했던 사람이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경우가 훨씬 많아."
"내 아들은 행복한 정육점 주인"
그의 철학은 "놀이가 생산이다"는 말에 다 녹아 있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유희적 동물이라고. 산업사회에서는 생존해야 하니깐 '노동'이 생산일 수밖에 없지만, 이젠 '놀이'가 생산이야. 택시운전사를 보라고. 하루 종일 앉아서, 뭐야 이게. 형벌이지. 근데, 10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논다고. 음악도 틀고 손님과 '노가리'도. 내 얘기,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거 아니거든. 무슨 일이든 10년을 하면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게 돼 있어. 이게 행복의 가치이고, 문화적 가치야."
그래서 일까? 그의 아들(31)은 정육점 주인인데, 무지 행복하다고 한다. "한 7년 전인가,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목욕탕엘 같이 갔는데 이 놈이 '2012년이면 지금 직업의 95%가 없어진대. 남는 5%는 뭘까' 묻더라고. 그래서 '먹는 장사 아닐까'했더니 '내일부터 학교 때려치우고 먹는 장사 하겠다'고 말하네. 냉면집 가서 냉면그릇 500개씩 몇 달 닦더니 한식당 주방은 좀 알겠다는 거야. 그러더니 일식당 가서 몇 달 생선 굽고, 다음엔 중식을, 또 다음엔 유통을 배워야겠다며 마트에서 생선을 팔았어. 왜 '떨이떨이'하면서 파는 거 있잖아. 그러다 육가공을 배워야겠다며 정육점에 취직했지. 1, 2년 돌다가 거기서 뭔가 비전을 봤나 봐. 정육점 딸이랑 결혼하겠다고 온 거야. 했지. 독립도 했어. 내가 좀 보탰는데, 순익 5대5 오케이? 이렇게 말이지. 아들 비전이 뭐냐고? 한 동네 '아도' 치는 거. 삼겹살 집, 치킨 집 다 하는 거. 조류독감 나오면 삼겹살 먹을 거고, 구제역 나오면 회 먹을 거고, 그거지 뭐. 행복하냐고? 항상 웃더라고. 표정이 너무 좋아. 찡그리는 게 없어."
최우영 이현수 기자 young@
P.S. 상업영화 은퇴선언을 번복한 영화감독 이준익의 다음 작을 기대해본다. 또다시 번복하기 전에. 그가 빨리 크랭크인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