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안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기부하면서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은 그 동안 그의 실체에 대해 기자가 가지고 있던 느낌을 보다 확실히 해주었다.
기자가 기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것도 그의 글에서 느꼈던 진정성 때문이다. 기자는 기부가 세상을 좀 덜 나쁘게 할 수는 있어도, 세상을 더 좋게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부자인 채로 죽는 게 부끄럽다”며 엄청난 기부를 했고, 록펠러도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지만 기업가로서 이들은 야만스럽게 노동자를 착취하고 탄압하며 부를 축적했다. 이들이 만든 기부의 전통이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로 이어오고 있지만, ‘나는 다른 부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과시적 소비라는 시각도 있다.
안 교수는 이메일에서 “중산층의 삶이 무너지고 젊은 세대들이 실의에 빠져있다. 공동체의 상생을 위해 작은 실천이 요구된다”고 적었고, 그래서 “‘우선’, 지분의 절반을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기회를 보장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쓰고 싶다”고 적었다. 그냥 돕고싶다는 것이 아니라 바꾸고 싶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는 또 “제 작은 생각이 마중물이 되어 많은 분들의 동참이 있었으면 한다”고도 적었다. 안 교수가 시작하려는 기부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안철수가 나와야 한다. 그가 대선에 나가든 안 나가든, 유권자가 그의 기부를 표로 연결시키든 말든. 이런 기부행위는 또 누군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의 기부에 대해 ‘고도의 정치행위’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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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부에 대해 기자도 굳이 불손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계산했을 것이다. ‘이 많은 돈이 있어도 어차피 쓸 데가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깐. 독점판매권을 준다 해도 명품 장사는 손도 못 댈 사람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