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심장, 美월가에서 벌어진 '계급투쟁'

머니투데이 김성휘 기자 2011.10.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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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사이트]

▲뉴욕 월가점령 시위에 참가한 청년이 '불가능한 일을 하자'는 구호를 쓴 피켓을 들고 있다. 미국 트위터 사진.▲뉴욕 월가점령 시위에 참가한 청년이 '불가능한 일을 하자'는 구호를 쓴 피켓을 들고 있다. 미국 트위터 사진.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전세계 금융 비즈니스의 중심인 뉴욕 월스트리트. 21세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심장부로 자처해 온 이들 도시에서 최근 심상치 않은 시위 사태가 벌어져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지난달 중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뉴욕에서 시작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et) 캠페인이 'DC를 점령하라'로 확산된 것. 이 시위는 로스앤젤레스와 미니애폴리스, 리치먼드 등 미국 수십개 도시로 퍼졌고 '함께 점령하자(Occupy Together)'라는 웹사이트도 등장해 시위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시위 초반만 해도 이를 '루저'(패배자) 몇몇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했던 미 정치권과 월가는 사태의 변화 양상을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모여든 이번 시위가 단순한 사회 갈등 수준을 넘어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계급투쟁(class warfare)의 서막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해프닝? 급속 확산 세계가 '깜놀'= 세계적 이슈로 부각된 이번 시위도 그 시작은 미약했다. 온라인 매체 '애드버스터'(Adbuster)의 제안으로 시작된 월가점령 시위는 지난달 17일 수만명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실제론 1000여명이 모이는 데 그쳤고 월요일(19일)엔 참가자가 수백명 단위로 줄었다.



해프닝으로 그칠 것 같던 분위기는 한 주 뒤인 9월24일 극적으로 반전된다. 이날 경찰의 강제진압 사실이 알려지며 시위대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됐고 시위대 거점인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 모여드는 인파가 급격히 불어난 것이다.

마침내 지난 5일 뉴욕에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과 노동조합이 가세, 1만5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월스트리트로 행진하면서 시위 열기가 절정에 올랐다. 경찰이 이들의 월가 진입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충돌을 빚었고 수십명이 연행됐다. 앞서 지난 1일 뉴욕의 명물 브루클린 다리를 접수한 시위대는 차도로 행진하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게 700명 넘게 연행되기도 했다.

이제 시위는 뉴욕을 넘어 미 전역으로, 또 세계로 퍼지고 있다. 지난 6일(현지시간)엔 백악관이 지척인 워싱턴DC 프리덤 광장에서도 워싱턴판 '점령 시위'가 벌어졌다. 이밖에 로스앤젤레스(LA), 앨라배마, 휴스턴, 오스틴 등 미 전역 900여개 도시에서 각 지역 이름을 딴 '점령' 시위가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인근 캐나다, 멕시코 등으로도 확산될 조짐이다.


자본주의의 심장, 美월가에서 벌어진 '계급투쟁'
고단하고 팍팍한 삶, 反월가 정서로= 이번 시위의 자양분은 학생과 젊은 실직자 등 경제적 소외계층이 금융위기를 거치며 겪어온 경제적 좌절과 박탈감이다. 2008년 위기 이후 미국은 국민 혈세로 끌어 모은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을 월가에 투입했다. 이로써 파국은 막았지만 경제적 양극화는 도리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경제 부진에 따른 소득감소, 실업자 증가와 소비 위축, 모기지 부실을 비롯한 주택시장 침체가 상호 악영향을 줬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실업수당을 청구하려는 행렬이 줄을 서고 미국 가계는 극심한 고통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구제금융으로 회생한 월가는 또다시 고수익을 갈구하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투자 행태를 제어하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개혁 조치는 월가의 끈질긴 로비와 압박 탓에 상당부분 후퇴했다. 이런 마당에 정쟁만 되풀이 하는 정치권과 탐욕스런 월가 금융권을 향한 대중의 반감이 한계를 넘어 마침내 거리의 정치로 분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시위는 장기 저성장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과 극심한 소득 불균형, 정치 불신의 3박자가 맞아 떨어지며 표면화됐다. 하지만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는 월가 시위대가 스스로 부유한 1%에 대항하는 나머지 99%의 대변자로 규정하는데서 알 수 있다. 다 같이 어려우면 참겠는데 혈세로 살아난 월가 금융인들은 여전히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잘 사는 것은 못 참겠다는 것이다.

▲10월8일(현지시간) 뉴욕 월가점령 시위에 나선 미국 농부가 자신이 참가한 이유를 인터뷰하고 있다. 동영상 화면.▲10월8일(현지시간) 뉴욕 월가점령 시위에 나선 미국 농부가 자신이 참가한 이유를 인터뷰하고 있다. 동영상 화면.
미국인들의 이런 인식은 퓨(Pew) 리서치센터와 워싱턴포스트의 공동 조사에서 대다수가 미국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현재 미국 상위 1%가 전체 부의 3분의 1을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미국내 소득 불균형은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펜실베이니아주 프랭클린&마셜 칼리지의 테리 마돈나 정치학 교수는 "이번 시위는 넓은 의미에서 계급투쟁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계급갈등 맞지만 논쟁보다 대안 모색해야=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월가 시위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 8월12일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인터뷰에서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 방식 자체에 자멸적인 속성이 있다고 예측했는데 이런 점은 옳았다"고 지적했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금융산업이 과도하게 번성하며 소득과 부가 노동에서 자본으로 재분배되면 일반 소비자의 소득이 줄고 이는 수요 감소로 이어져 기업의 일자리 축소를 초래하고 이는 다시 소득을 줄이는 악순환을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뉴욕타임스(NYT)도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은 '월가 금융권과 기업이 금융위기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미국 전역으로 번지는 시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태가 위험한 양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도 한 인터뷰에서 수년째 이어진 미국의 경기침체가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분기별 연율 국내총생산(GDP) 증감률, 인플레이션 조정ⓒ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EA), Tradingeconomics.com▲미국 분기별 연율 국내총생산(GDP) 증감률, 인플레이션 조정ⓒ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EA), Tradingeconomics.com
부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미국 전역으로 번지는 '점령하라' 시위의 본질인 만큼 부자들, 금융회사, 기업 등 '가진 자'로 분류되는 계층에서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월가 시위대는 우리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실망감을 표출했다"며 시위의 명분에 공감을 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점령하라' 시위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이 정당에 등을 돌리고 거리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월가와 워싱턴 등지의 시위대에선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과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특히 올해 부채한도와 증세를 둘러싸고 민주공화 양당이 벌인 소모전은 미국인들 사이에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정치의 실종' '정당의 위기'가 한국 정가의 화두가 된 지금, 뉴욕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의 함성이 우리에게도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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