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손에 든 연기금, 외풍 앞에선 '촛불'

머니투데이 임상연 기자 2011.09.02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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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증시 개조 프로젝트 'WHY&HOW' ⑦수급 불균형]

"연기금, 기관투자가들의 비중이 너무 낮다. 증시 안정을 위해서는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미국 신용등급 하락으로 코스피지수가 장 초반 10% 이상 폭락한 지난 9일 김석동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하루종일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자본시장 최고경영자(CEO)들과의 긴급 회의에서, 국회 정무위 현안보고에서, 금융위 간부회의에서 "기관이 나서줘야 한다"를 거듭 강조했다.

외국인 투매 때마다 속수무책 무너지는 한국증시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1990년 자본시장 개방이후 꼬일 대로 꼬여버린 수급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적인 측면도 있지만, 글로벌 경기에 민감한 외국인과 단기투자 성향이 강한 개인투자자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면서 외풍에 심약한 증시가 만들어졌다는데 이의를 달 시장 관계자들은 별로 없을 듯하다.



김 위원장이 '증시안정기금' 조성 필요성까지 언급하고 나섰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증시를 현금지급기(ATM)마냥 사용하는 외국인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이자 , 기관의 증시 안전판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00조 손에 든 연기금, 외풍 앞에선 '촛불'


◇취약한 수급 ,심약한 증시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투자주체별 시가총액 비중은 외국인이 31.2%로 가장 높고, 개인투자자들이 24.1%로 뒤를 잇고 있다. 기관 비중은 13.4%에 불과하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선진국 증시의 기관 비중이 60~80%에 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경우도 기관 비중이 30%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증시 시가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과 개인투자자의 자금 대부분은 대외변수에 민감하고, 단기적 이익을 쫒는 단기성 자금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7월말 현재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외국인 투자자는 3만2426명으로 이중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등 주가등락에 따라 자금유출입이 잦은 집합투자기구가 전체 42.6%인 1만3821명에 달한다. 장기성 투자자금으로 구분되는 해외 연기금이나 기관투자가는 8.8%(2871명)에 불과하다.

미국 신용등급 급락이후 국내 증시가 과도하게 반응한 것도 룩셈부르크, 케이만군도 등 조세피난처에 근거지를 둔 집합투자기구들이 주식을 대거 내다 판 영향이 크다. 이달 들어 지난 25일까지 외국인들은 5조3384억원을 순매도했는데 이중 37%가 룩셈부르크(1조2307억원)와 케이만군도(7599억원)에서 나온 매물이다.


500조 손에 든 연기금, 외풍 앞에선 '촛불'
◇망설이는 연기금, 등 돌린 기관들

금융위 관계자는 "최근처럼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 때가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이 싸게 주식비중을 늘릴 수 있는 기회"라며 "외국인 시가총액 300조원중 100조원만 가져와도 변동성 축소는 물론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치상으로는 여력이 충분하다. 국민연금, 우정사업본부, 교원공제회, 군인공제회,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 국내 주요 연기금의 운용자산만 500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주식투자 비중은 340조원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24%(국내외 전체), 우정사업본부는 10%가 채 안 된다.
기관투자가도 마찬가지다. 하나대투증권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총자산(6월말 250조) 대비 주식투자 비중이 2%(5.2조원) 정도에 불과하고, 신한은행(217조원)도 2.5%(5.5조원)에 불과하다. '출자주식'이나 계열사 지분을 제외하면 주식투자 비중은 더 낮아진다.

보험사들도 비중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국내 3대 보험사중 삼성생명이 10%(총자산 146조원, 주식투자 15.3조원)로 가장 높지만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을 제외한 순수 주식 투자는 7029억원에 불과하다. 대한생명(총자산 63.7조원, 주식투자 1.3조원)과 교보생명(57.8조원, 1.1조원)은 주식투자 비중이 2% 안팎에 그치고 있다.

주식거래가 주 업무인 증권사들도 자기자본 대비 주식투자 비중이 우리투자증권(자기자본 2.6조원, 주식투자 5000억원) 19%, 대우증권(2.9조, 2870억원) 10%에 그치고 있다. 감독당국 관계자는 "국내 금융기관들은 대출, 채권 등을 통한 안정적인 이자수익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00조 손에 든 연기금, 외풍 앞에선 '촛불'
◇"주식투자 확대 부담" VS "운용효율성 높여야"

연기금이나 금융기관들은 위험자산인 주식투자 비중을 무턱대고 늘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민적 공감대가 여전히 낮은데다 자기자본비율(BIS) 등 재무건전성 규제도 부담이라는 설명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재무건전성을 높이라며 주식투자 비중을 억제하더니 이제 와서 시장 안전판 운운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며 "더 까다로워진 새로운 국제회계 기준 때문에 무조건 주식투자를 늘리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연기금이 기금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금융기관들이 천수답 수익구조에서 벗어나 선진금융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주식투자에 나설 때라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당국도 제도개선 및 규제완화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희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 연기금이나 기관들은 주식을 위험이 아닌 투자수단으로 인식하는데 반해 국내의 경우 위험자산으로만 생각한다"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연기금과 기관이 주식투자를 늘려 운용 효율성을 높인다면 수익률 제고는 물론 경제 및 사회 안전망으로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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