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을 양반들 기싸움..바다건너 소문났네

머니투데이 최병일 기자 2010.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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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편집자주 경주라는 도시는 천편일률적으로 수학여행을 갔다온 지역이어서 그리 입체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아는 도시 석굴암과 첨성대 불국사로 대별되는 신라문화의 정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가본 경주는 단지 추억의 잎사귀처럼 바스러지지 않았다. 농밀한 이야기가 마을 구석구석에 묻혀있고, 사각거리는 선비들의 옷자락이 귓가를 스치고 갔다. 푸른 기상을 간직한 마을 양동으로 1박2일 추억여행을 떠났다.


조선시대 한 마을 두 가문
자존심 걸고 세운 건축물
500여 성상속에 오롯이…
마을 한채 한채가 문화재


▲양동마을 전경 모습 ▲양동마을 전경 모습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은 이언적 선생의 큰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다. 무첨당에서 향단과 심수정 옥산서원까지 성리학의 대가 이언적 선생의 흔적이 묻어 있다. 양동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들른 옥산서원은 이언적 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서원은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중종 때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 선생의 원래 이름은 이적이었다.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붙여주었을 정도로 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

서원에서 눈을 들면 바로 화개산이 보인다. 마치 병풍처럼 수목이 서원을 감싸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고아한 풍취를 자랑한다. 서원의 경내에는 구인당이 있다. 어진 것을 구한다는 회재 선생의 핵심 사상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다.



강당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고 구인당은 한석봉의 글씨다. 당대 최고 서예가들이 마치 서로의 솜씨를 뽐내듯이 앞뒤로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은 보기드문 풍경이다.

옥산서원을 거슬러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묵향이 뭉근하게 퍼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500년을 견딘 세월의 향기이기도 하고 옛 사람들의 역사가 빚어낸 사람냄새이기도 하다.

마을은 오래됐어도 어느 것 하나 누추한 것이 없다. 이름 없는 초가집에도 향나무 하나조차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집단적으로 살아온 대표적인 반촌이며 전통마을이다.


▲양동전경모습 ▲양동전경모습
이 마을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당당하게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명당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지관들은 주장하지만 그리 허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양동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등선이 `골자기 물(勿)돴자형 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명당에는 인물이 난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 보다. 월성 손씨인 손소 선생을 비롯해 이조판서를 지낸 청백리의 표상 우제 손중돈 선생과 성리학의 대가 이언적 선생까지 이 마을 사람이다. 손씨와 이씨가 공존하며 살았다하니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질시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먼저 마을에 들어선 이는 손씨였다. 양동마을 월성 손씨의 대종택이 된 서백당을 중심으로 가세를 펼쳐나갔고, 이씨는 손씨 대종택에서 바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골에서 능선 하나를 넘은 물봉골 안쪽 중턱에 터를 잡아 여강 이씨의 대종택이 된 무첨당을 지었다고 한다.

▲심수정 모습 ▲심수정 모습
이후로도 두 성씨 간의 경쟁은 은근히 치열했다. 손씨가에서 관가정을 지으면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향단을 세웠다. 학문과 휴식을 위한 정자인 수운정을 지으면 이씨가도 심수정을 지었다.

심지어 교육시설도 따로 지었다. 손씨가에서 안락정을 지으면 이씨가에서는 강학당을 세웠다. 이언적 선생을 기리는 옥산서원에 비견되는 것이 우재 손중돈 선생을 기리는 동강서원을 세운 것을 보면 두 성씨 간의 경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양동마을엔 모두 160여가구가 들어서 있다. 종택에서 하인들의 초가집까지 두루 갖춘 마을을 둘러보면 그야말로 한 시대의 풍경이 뚝 잘려서 전시된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든다.

양동마을은 평평한 지대가 아니라 높고 낮은 지세에 따라 가옥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높은 곳에는 명문대가의 종택이, 그 아래에는 양반가옥이, 그리고 더 밑 지대에는 하인들이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는 예전에 양반댁 일을 돕던 외거의 하인들이 주변에 살면서 생긴 구조라고 한다. 마을은 마치 양파처럼 여러 겹의 껍질을 지녔다. 한 꺼풀을 벗기면 새로운 가옥이 나오고 등성이를 돌면 또다른 가옥이 보인다. 가옥의 모습도 일정하지 않다.

집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녀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조선시대 가옥의 전모를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마을에는 실개천과 천이 있고 산책을 할 만한 오솔길까지 있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주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자 손씨의 대종택인 서백당은 안골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서백당은 `口자돴 형태로 지었다. 아직 남녀차별의 유교이념이 완전히 정착된 단계에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채와 사랑채 구분 없이 하나의 공간에 지었다. 특히 서백당은 산실방이 유명하다.

손중돈과 이언적이 바로 이 방에서 태어났다. 풍수가들은 이 방에서 세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앞에 두 사람이 태어났으니 앞으로 1명 남은 이는 손씨가에서 나오게 하고 싶어 절대로 산실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위쪽에는 사당이, 아래쪽에는 오랜 향나무가 위엄서린 모습으로 서백당을 지키고 서 있다. 특히 고택의 나이인 수령 540년의 향나무는 마치 분재처럼 구불구불 꼬여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무첨당 ▲무첨당
'조상에서 욕됨이 없게 한다' 는 뜻의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 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 씨의 종가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마치 비밀정원으로 들어가는 듯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채의 날아갈 듯한 처마와 정밀하게 조각된 난간 등이 세련된 솜씨의 주택임을 보여준다.

무첨당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의 풍류와 학문' 이라는 말인데, '무릇 선비란 풍류를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 는 뜻이 담겨 있다.

관가정에서 바라보는 기름진 안강 들 마을을 찾았다면 꼭 둘러봐야할 가옥들이 있다. 바로 보물로 지정된 고택들이다. 먼저 만나게 되는 보물은 관가정. 정충비각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면 세월의 깊이가 물씬 풍기는 건축물이 나온다.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을 가진 관가정이다.

과연 관가정 누마루에 오르니 기름진 안강 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쪽에는 하인들의 거처였던 4~5채 가량의 초가를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손 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구름 모양의 누마루도 예쁘다.

땀을 식히며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99칸의 위용을 자랑했던 향단도 주목해 볼거리다.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관찰사로 부임할 때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목재를 하사해 지은 집으로, 지금은 56칸만 남아 있다.

▲수졸당 모습▲수졸당 모습
마을을 돌아 오솔길로 내려올 즈음 땅거미가 서서히 마을에 내려앉았다. 마을은 다시금 비밀의 커튼을 치고 견고한 얼굴로 그림자를 내려 보았다. 그 사이로 옛사람들은 늦은 저녁을 준비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오래된 일상이 따스하게 손을 내밀었다.

◎ 양동마을 가는 방법
▶경부고속도로 영천IC―영천시내―안강방면 28번국도 이용 34㎞ 정도가면 양동민속마을 입구―우회전하여 1.2㎞―양동마을

▶경주역에서 포항방면 7번국도 이용, 19㎞ 진행―강동IC에서 안강쪽 28번국도로 들어서 2㎞ 진행―양동마을 입구(제2강동대교)에서 우회전하여 1.2㎞―양동마을

◎ 숙박안내
▷숙박안내 : 양동마을 내에 있는 남산댁초가(054-762-4418) 우연제(054-762-8096) 흙담초가집(054-762-8444) 이향정(054-762-4195)등이 있다.

▷양동마을여행 문의=경주시청 문화관광과(054)748-9001, 양동마을(정보화마을) 070-7098-3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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