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죽(血竹)으로 다시 피어난 항일정신

머니투데이 2009.12.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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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교양강좌]민영환, 자결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애국지사들이 불의의 현실에 굴복하느니 극단적인 방법일지라도 그 현실의 벽에 피 흘려 항거할 때 역사는 이를 자결(自決)이라고 부른다.

1905년 11월 30일 을사늑약에 항거해서 자결한 민영환의 삶과 정치, 외교활동을 고찰함으로써 파란만장하게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성격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민영환의 가계, 출사와 정치활동, 외교활동, 항일순국 등을 당시의 국내외상황과 관련하여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죽어도 죽지 아니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민영환(閔泳煥, 1861.7.2~1905.11.30)은 여흥 민씨, 호는 계정(桂庭),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며, 명성황후의 조카다. 그는 17세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병조판서·한성 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당상관이 될 만큼 권력의 단맛을 충분히 맛본 권력의 실세이기도 했다. 일본·미국·영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를 일주한 인물이기도 하다. 견문을 넓히고, 선진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즉시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는데 힘을 쓰는 한편, 민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민영환은 독립협회를 지원하다가 한때 관직에서 파면 당하기도 했다. 관직에 복귀되어 나라 일을 보다가 조금씩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일본을 성토하면서 친일파들과 대립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한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대신들을 인솔하여 대궐을 나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뢰고 일본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영환의 일행은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으며 다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3일이 지난 같은 해 11월 30일 오전 6시, 민영환은 조용히 할복 자결한다.


"아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격심한 이 세상에 우리 백성의 운명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죽어야 할 때 구차스레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어찌 모르랴. 나는 지금 죽지만 혼(魂)은 죽지 아니하여 지하에서나마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오호국치민욕내지어차)' 민영환의 유서 中 -
민영환의 유서는 지배층의 한 사람이 왕조의 몰락을 책임지고 자결로 속죄하였다는 점에서 읽는 이의 가슴속 깊이 큰 울림을 남기었으며 그의 자결은 순국과 항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록 몸은 죽어도 정신은 남는 법! 이듬해 봄, 피 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푸른 대나무가 돋아났으니 혈죽(血竹)을 피워낸 그의 충심은 후대 사람들의 뇌리 깊숙이 그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진정한 애국자로 남게 하였다.



다시 피어난 항일정신과 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구한말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 자신의 항일정신을 자결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통해 승화시킨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책임 있는 정치가인 '민영환'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고 쉽게 알려주는 동국대 역사교육과 한철호 교수의 강의는 한국사, 특히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강의이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학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석사, 한림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일관계사학회, 역사학회, 한국사연구회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강좌 바로가기 : 한철호 교수/ 민영환, 혈죽(血竹)으로 다시 피어난 항일정신과 그 의의
<기사 및 동영상 강좌 제공 : ㈜에버에듀닷컴(www.evere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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