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학동마을'의 피곤한 여행

머니투데이 배혜림 기자 2009.12.0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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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학동마을'의 피곤한 여행


현대 미술에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사조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미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사조는 그려지는 이미지보다 인간 내면의 정신성을 그림의 본질로 여긴 것이 특징이다.

벽 한 면을 뒤덮을 만한 대형 사이즈의 캔버스를 강렬한 단색으로 뒤덮어 버린 유명한 마크 로드코의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뉘어진 캔버스에 물감을 뿌려 에너지와 긴장을 교차시킨 잭슨 폴록의 작품도 잘 알려진 추상표현주의 그림이다.



우리나라에도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통해 자기를 초월하려 했던 여류 화가가 있었다. 최욱경 화백이다. 최 화백은 대형 화면, 원색, 거친 붓놀림을 사용한 대담한 화가였다. 사랑과 영생을 고뇌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 그린 작품이 바로 빨강색 바탕에 추상화된 자연의 형태를 표현한 '학동마을'이다.

최 화백은 '학동마을'이 요즘 국민적 관심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국세청 인사청탁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이 자신의 그림에서 시작됐고 또 '학동마을은 곧 뇌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어설프게 포장한 학동마을을 가인갤러리에 들고와 작가와 가격을 물은 뒤 희망가격을 알아서 적어달라고 했다"는 가인갤러리 대표 홍혜경씨의 폭로를 접하고 최 화백을 떠올리면 민망해진다.

미술품이 뇌물로 활용된 의혹이 제기돼 검찰 수사로 이어진 사례는 이전에도 다수 있었다. 현재 국세청의 안원구 국장은 세무조사 무마를 대가로 업체들에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가인갤러리에서 미술품을 강매하는 방법으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안 국장은 '학동마을' 그림로비의 최초 발설자로 지목돼 '미술품 강매'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뇌물그림을 무마하려고 또 다른 뇌물그림이 터져나온 셈이다.


예술이란 진리를 경험하는 통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이고 결국 고통이지만, 예술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표현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는 철학자도 있었다.

그림을 보고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림이 돈으로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동마을이 그림을 돈으로 보는 사람들의 손에서 뇌물로 주목을 받는 '피곤한 여행'을 하루빨리 마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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