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 내일 죽을 것처럼

머니투데이 김영권 머니위크 편집국장 2009.11.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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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인생드라마 안내문/ ④짝퉁드라마는 이제 그만

내 인생 드라마는 '짝퉁'이다. 수십년 열심히 찍는다고 찍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 짝퉁이다. 진짜가 아니다. 베낀 것이다. 베껴도 원본을 베낀 게 아니라 짝퉁의 짝퉁을 베낀 것 같다. 짝퉁은 깊이가 없다. 감동이 없다. 진심이 없다. 영혼이 없다. 아! 허망하다.

얼마나 짝퉁인가. 지금까지 찍은 필름을 되돌려본다. 젖 먹던 시절이야 아는 게 없으니 건너 뛰자. 기억이 어렴풋한 대여섯살 즈음에는 행복했다. 잘 놀고, 잘 먹고, 잘 컸다. 대신 말도 잘 들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대로 잘 따랐다.



학교에 가서는 보다 강력한 심화학습을 받았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할 것도 어떤 것부터 해야 하는지 그 순서를 배웠다. 어떻게 예의범절을 갖추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지도 배웠다.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벌을 받는지도 알게 됐다. 그 벌이 얼마나 아프고 쓰린지도 맛보았다. 어떤 게 좋고, 멋있는지에 대해서도 코드를 맞췄다.

이 엄격하고 숨막히는 학습과정을 모범적으로 이수했다. 남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이 성장했다. 상식이 통하게 됐다.



그 이후 군대 가고, 취직 하고, 결혼 하고, 가정을 꾸미는 과정은 생략한다. 아마 당신도 똑같을테니까. 나는 내 드라마를 찍는다고 찍었는데 그것이 당신의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모르겠다. 모두 비슷비슷한 짝퉁이다. 삼류 애정소설같다. 싸구려 무협지 같다. 주인공의 이름만 다른 뿐 이야기 구조는 똑같다.

시나리오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강호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다.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전투가 격렬하다. 모든 전투는 시장으로 통한다. 이름하여 '세계 경제전쟁'이다. 이 전투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쪽이 이긴다. 하지만 돈 벌기가 쉽지 않다. 무림 고수들이 격돌한다. 병사들은 지치고, 사상자가 속출한다. 승자들도 고단하다. 벌어도 벌어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에 도무지 끝을 낼 수가 없다. 끝없는 소모전에 지구는 황폐해진다. 지구는 그것을 감당하기 어렵다. 지구의 다른 생명들도 인간의 전투에 유탄을 맞고 위기에 몰린다.

어둡고 비관적인 스토리. 모두 이 각본에 근거해 자기 인생 드라마를 찍는다. 촬영은 자나깨나 전투 장면이라 여유가 없다.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너'를 챙길 여지가 없다.


그러니 이 숨가뿐 짝퉁 드라마는 그만 찍어야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인생 드라마를 최종회부터 되돌려 보자. 마지막은 죽음이다.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자.

첫째, 내일 죽는다. 이건 너무 황당하다. 절망할 시간도 없다. 이 순간 숨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태양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 가을 바람이 얼마나 소슬한지 촌각이라도 더 실감하는 게 상책이다.

둘째, 1년 뒤 죽는다. 그렇다면 하루도 낭비할 수 없다. 짝퉁 드라마를 당장 끝낸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간추린다. 이른바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만든다. 그리고 나를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시작한다.

셋째, 10년 뒤 죽는다. 아직 시간은 있다. 그러나 머뭇거리면 늦는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포트폴리오와 스케쥴을 짠다.

넷째, 늙어 죽는다. 시간은 넉넉하다. 이제야말로 진짜 드라마를 찍을 때다. 힌두교에서는 50살이 되면 숲으로 들어가 신과 대화하라고 한다. 10대엔 공부하고, 20대엔 결혼하고, 30대엔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을 꾸리고, 40대엔 사회에 공헌하고, 50대엔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홀로 신을 만나러 숲으로 가라는 것이다. 참 자아와 내 안의 신성을 찾아서 순례의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생 드라마를 찍되 이같이 찍자. 바로 내일 죽을 것처럼 삶을 만끽하며 찍자. 100%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동을 찍자. 깨어 있는 진짜 내 이야기를 찍자. 그게 아니라면 그건 죽을 때까지 진본이 아니다. 진짜로 산 것이 아니다.

  ☞웰빙노트

결혼을 하면서 우리는 나만의 삶을 통째로 옆으로 밀쳐 놓게 된다. 월급을 받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고, 새벽 4시에 아이 젖을 먹이고, 아이를 등하교시키느라 시간을 보내고, 여기에 병원 예약과 운동, 데이트가 포함된다. 중년이 되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런 시간의 감옥(그렇게 열심히 자기가 만들어온)에서 탈출할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 순간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맴돌기 시작한다.
 인생의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예전의 가치를 재평가하라는 외침을 듣는다. 하지만 인생 전반부에는 인격의 틀을 만들어가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이 딛고 있는 발판이 움직이는 모래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로버트 존슨 & 제리 롤, 내 그림자에게 말걸기>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고 합시다. 사진에 담기는 장면들은 피라미드 모양을 이룹니다. 피라미드의 가장 밑 칸에는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1시간에 6km의 속도로 이동합니다. 피라미드의 아래쪽 두번째 칸에는 자전거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보다 두 배 바른 속도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위 칸에 있는 이들은 조금 더 부자입니다.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속 50km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살 수 있는 그 위 칸의 사람들은 시속 80km의 속도로 이동합니다. 우리는 이제 피라미드의 높은 칸에 와 있습니다. 이보다 높은 곳에는 비행기를 탄 사람들이 시속 800km로 이동하고, 또 더 위에는 콩코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만큼 아주 돈 많은 이들이 시속 1500km로 신속히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위의 피라미드 꼭지점에는 시속 2만8000km로 맹렬히 소비하는 소비자들의 있습니다.<장피에르 카르티에 & 라셀 카르티에,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이 가을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마십시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생애 단 한번뿐인 가을입니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이 삶입니다. 이 가을날, 그저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아름다움은 남과 나누는 데서 움이 틉니다. 이 가을에 다들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행복해지기 바랍니다.<법정, 일기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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