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 만리 강물에 발을 씻고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인겸 더벨 대표이사 부사장 2009.07.0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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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다 몇달 전 은퇴한 분을 만났습니다. 10여년 이상 자주 만나 취재를 한 분이라 서로 거리낌 없이 얘기를 나눴습니다.
 
퇴직하기 전 임원까지 지냈으니 예전 같으면 계열 자회사 사장자리는 하나 차지했을 법도 한데 이젠 꿈도 못 꾼다고 했습니다. 줄을 타고 내려온 외부인사들이 대부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기업만 해도 자회사 5곳 가운데 3군데가 이렇게 선임됐다고 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일부 자회사의 경우 사외이사 자리까지 밀고 들어오는 통에 정말 난감하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취재원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시절에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며 혀를 찼습니다.
 
얼마 뒤 이번에는 다른 현직 공기업 임원을 만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임원은 자기 회사의 CEO를 보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현 정부의 실세들과 가까운 사람으로 외부에 알려져 있고, 실제도 그렇지만 '실세 CEO'는 자신의 뜻대로 임원인사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야 있겠냐고 따졌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힘 있는 사람들과 가깝다보니 그만큼 더 인사청탁을 받게 되고, 점잖은 체면에, 더욱이 서로 잘 아는 처지에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10여명의 임원 중 '실세 CEO'가 자신의 뜻대로 임명한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각 부처 장관에 대한 인사권 위임을 발표했습니다. 뒤이어 청와대는 정부 산하기관 인사에 대해서도 자율성을 확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청와대 실무 인사라인도 개편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최근 심각한 인사문제를 파악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해 현 정부가 그렇게 비판하는 과거 10년보다 더 심하게 특정지역 출신 위주로 인사를 한다는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한편에선 수긍이 갑니다.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기관이라는 곳이 국가경제의 핵심 역할을 하는 만큼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같이하는 사람들로 채워져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공기업이나 준공기업의 최고경영자나 감사뿐 아니라 일반 임원인사까지 간섭하고, 자회사 임원자리까지 내놔라 하고, 사외이사 자리까지 챙긴다면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줄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일을 제대로 하기보다 늘 정치권 등 외부동향에만 신경쓰고, 그러다보니 내부불화의 원인이 되고, 이런 인사를 받아들인 CEO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참으로 곤혹스런 상황이 연출됩니다.
 
'중도'가 화두입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원래 우파보다 중도실용에 가깝지요. 타고난 서민적 이미지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은 'MB다움'의 회복입니다.
 
중도가 강화되려면 정책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중도실용적 인사가 등용돼야 합니다. 순위를 매기자면 탕평책보다 탕평인사가 우선입니다.
 
그런데 탕평인사보다 더 먼저 추진돼야 할 게 있습니다.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기관의 장들이 최소한 자기와 함께 일하는 일반 임원들이나 자회사 임원은 소신껏 선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고선 탕평의 인사도, 중도강화론도 진짜로 웃기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진짜 속좁은 정권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천길 벼랑 위에서 옷깃을 휘날리고, 만리 강물에 발을 씻는 기개나 포용은 바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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