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이건희의 빈자리

머니투데이 성화용 시장총괄부장 2008.09.18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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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심상치 않다고들 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 주력사업이 모두 그저 그렇다. 생산도 투자도 그럭 저럭, 쌈박한 신상품도 없고 브랜드 가치도 많이 떨어졌다. 일본의 경쟁업체들이 '삼성 디스카운트'라는 말을 흘리고 다닌다.

삼성의 한 간부는 "삼성의 '아이덴티티'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뭔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사실 뭔지 모를 리 없다.



70년 사업력 내내 오너 회장이 끌어온 기업이다.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계열사 독립경영이 몇 달만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착되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일 것이다.

오너 부재에 따른 '금단현상'일 수도 있고 '과도기'일 수도 있다. 기업은 유기체다. 하루 아침에 체질이 바뀌지 않는다. 당분간 삼성은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회장의 빈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옛 회장은 그룹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바깥 바람이 예사롭지 않을 땐 한동안 침묵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부릅뜨며 정신차리자고 일갈했다.

그 때 쯤이면 삼성맨들은 날 선 긴장으로, 핏발 선 눈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회장이 가리키는 곳에 모여들곤 했다. 누군가는 회장을 '황제'라고 비난했지만, 또한 그는 대오의 맨 앞줄에서 찬바람과 마주했던 무한책임의 오장(伍長)이기도 했다.

어떤 걸출한 전문경영인이 등장해도 그 자리를 예전의 질감 그대로 채우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안다. 삼성의 후계자로 부회장 자리에 앉은 게 30년 전, 회장이 된 게 21년 전이다. 그 세월을 함께 녹일 수 없다면 애초부터 빈자리는 채워질 수 없을 터였다.


엄하고 두렵던, 엉뚱하고 총명하며 집요했던, 때로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았던 옛 회장은 지금 재판 일정을 헤아리며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고 있다. 그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것 처럼, 삼성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어차피 그 자리는 이대로 비워둘 수 밖에 없다. 삼성은 이렇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비용을 치러야 한다. 뭐 하나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미적대는 상황을 안타깝게 버텨내야 한다.

얼마전 한 진보논객은 "삼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은 떠나고 삼성은 흔들리는데 그들은 여전히 삼성을 '가장 효율적인 적(敵)'으로 여기는 듯 하다.

이 고단한 세월이 조금이라도 빨리, 덜 위험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 때까지 삼성이 옛 회장 문제로 다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건강과 안녕이 강을 건너는 삼성에게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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