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 주력사업이 모두 그저 그렇다. 생산도 투자도 그럭 저럭, 쌈박한 신상품도 없고 브랜드 가치도 많이 떨어졌다. 일본의 경쟁업체들이 '삼성 디스카운트'라는 말을 흘리고 다닌다.
삼성의 한 간부는 "삼성의 '아이덴티티'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뭔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사실 뭔지 모를 리 없다.
오너 부재에 따른 '금단현상'일 수도 있고 '과도기'일 수도 있다. 기업은 유기체다. 하루 아침에 체질이 바뀌지 않는다. 당분간 삼성은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밖에 없다.
그 때 쯤이면 삼성맨들은 날 선 긴장으로, 핏발 선 눈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회장이 가리키는 곳에 모여들곤 했다. 누군가는 회장을 '황제'라고 비난했지만, 또한 그는 대오의 맨 앞줄에서 찬바람과 마주했던 무한책임의 오장(伍長)이기도 했다.
어떤 걸출한 전문경영인이 등장해도 그 자리를 예전의 질감 그대로 채우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안다. 삼성의 후계자로 부회장 자리에 앉은 게 30년 전, 회장이 된 게 21년 전이다. 그 세월을 함께 녹일 수 없다면 애초부터 빈자리는 채워질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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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하고 두렵던, 엉뚱하고 총명하며 집요했던, 때로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았던 옛 회장은 지금 재판 일정을 헤아리며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고 있다. 그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것 처럼, 삼성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어차피 그 자리는 이대로 비워둘 수 밖에 없다. 삼성은 이렇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비용을 치러야 한다. 뭐 하나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미적대는 상황을 안타깝게 버텨내야 한다.
얼마전 한 진보논객은 "삼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은 떠나고 삼성은 흔들리는데 그들은 여전히 삼성을 '가장 효율적인 적(敵)'으로 여기는 듯 하다.
이 고단한 세월이 조금이라도 빨리, 덜 위험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 때까지 삼성이 옛 회장 문제로 다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건강과 안녕이 강을 건너는 삼성에게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