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숭례문 어처구니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8.02.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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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뉴욕리포트]

미국의 국보1호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미국은 우리처럼 순번이 매겨진 국보 보물이 없고, 국립공원 관리국(National Park Service)에서 사적지와 유적,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경관을 '국가유물(National Monument)' '사적지(Historic Site)' '국립공원(National Park)' 등으로 구분해 관리한다. 일방적으로 정부가 지정하는게 아니라 일반인도 NPS에 등록을 신청할수 있도록 돼 있어서 어지간한 '동네'건물들도 사적으로 지정돼 있는게 많다.

NPS에 등록된 '보물'이 아니래도 미국인들은 나라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자신들 주변에 조금이라도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것들을 몹시 애지중지한다.
기자가 사는 동네에도 '드 윈트(De Wint) 하우스'라는, 조지 워싱턴 미국초대 대통령이 독립전쟁때 잠시 임시 사령부로 썼던 건물이 보존돼 있다. 자원봉사자 겸 관리자가 이곳에서 머물며 관리를 하고, 때때로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지역 축제를 열기도 한다.



역사가 길지 않은 미국인지라 유물들에 쌓인 세월의 더깨는 두텁지 않다. 뉴욕이 자랑하는 박물관들도 근대 작품들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워싱턴 DC의 거대한 구조물들, 뉴포트의 화려한 저택, 보스턴의 고(古)시가 같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유적이래봤자 기껏 200∼300년 묵은 것들이다. 한국사람들은 "우리 나라에선 그래도 최소한 500년은 지나야 좀 오래됐나보다고 한다"며 웃어주는 호기를 부릴수도 있다.

해외에 나와 있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든든하게 담아뒀던 그런 '자존심'하나가 어이없게 사라졌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남대문('숭례문'보다는 '남대문'이 더 정겹다)'은 고국을 찾게 되면 늘 한번 거쳐가게 되는, 미국인들로 치면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존재였다. 비록 고층건물 그림자에 가려 있어도 600살 나이답게 주변의 콘크리트 건물들을 압도하는 당당함으로 기억돼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국에는 남대문이 없단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곳 현지 동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동포들은 고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멀리서 많이도 지켜봤지만, 이처럼 어이 없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굳이 '국보 1호'라서가 아니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겐 한국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일수 밖에 없는 곳"이라며 허탈해했다. 남겨놓고 온 고향의 한 구석이 휑하게 쓸려가버린 느낌이라는게 이곳 현지 동포들의 반응이다.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내 한가운데에서, 인적이 끊어진 신새벽도 아닌 초저녁에 그냥 날려보내다니.
'경비원이 있었네 없었네, 서울시가 잘못이네, 현 정부의 잘못이네, 당시 시장이던 이명박 당선인 탓이네...' 따져본들 무엇할까. 복원이 가능한다 한들 이미 이전의 남대문은 없어진 것이다.

남들은 시골 동네의 조그만 집 한채도 관리인이 지키면서 보존하는데 우리는 오래된 것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가볍게 여기고 살아왔나 보다.
남대문 지붕에서 내려다보며 세상을 지켜왔던 '어처구니(궁궐 건물이나 문루의 기왓지붕위에 한줄로 늘어놓은 사람이나 동물모양의 흙인형)'들이 불에 타 버렸으니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어진 격이다.


남대문만이 아닐 것이다. 부모님 손때 묻은 물건들, 오랜시간 함께 해온 사람들, 당연한듯 누려온 산·들·물·공기...그런 것들이 다 사람들 마음속의 남대문일 것이다. 있을 땐 모르다가 사라지고 나면 이리 휑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사라진 숭례문 어처구니


↑ 숭례문 기왓지붕 위 '어처구니'가 불타 없어졌다.↑ 숭례문 기왓지붕 위 '어처구니'가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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