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 배 만들 돈으로 조선사 인수

더벨 박준식 기자 2007.10.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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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성격 선수금 활용..유동성에 큰 문제는 없어

STX그룹이 유럽 최대선사 아커 야즈의 지분 39.2%를 사들이는 데 사용한 8억 달러(약 7300억원)는 과연 순수한 내부 유보자금일까. 발표직전까지 금융권의 도움없이 비밀을 유지하면서도 수천억원의 실탄을 소리없이 준비한 배경에 관심이 집중된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상반기 말 현재 STX조선의 현금성 자산은 약 4700억원 수준. 이번 지분투자를 위해 사용한 6400억원(STX엔진 900억원)보다 약 1700억원이나 모자라는 수치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3분기 실적을 토대로 영업이익이 급속히 호전됐다고 해도 갭이 지나치게 크다. 같은 기간 매출액(8700억원)을 감안, STX조선 급의 회사가 상시적으로 필요한 운전자금을 최소 2000억~3000억원 수준으로 본다면 이번 투자를 위해 STX조선이 보유 중이던 현금성 자산은 8000억원에서 1조원 사이였다는 역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반기 재무제표를 근거로 단 1분기만에 현금성 자산이 2배 이상 늘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유보자금이 아니라 배를 짓기 위해 받아둔 선수금을 일부 사용했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상반기까지 STX조선과 STX엔진의 수주잔액은 각각 7조5000억원과 3조원 수준. 수주잔액은 배를 짓기 원하는 선주와 배를 짓는 조선사가 선박 건조를 완료한 후 인도시점까지만 치르면 되는 총 대금을 말한다. 같은 기간 실제로 손에 쥐고 있던 현금인 선수금은 각각 5800억원, 2600억원이다.

선박의 경우 비교적 싼편에 속하는 벌크선도 최근 가격이 폭등, 평균가격이 9000만 달러(820억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선주들은 대금을 여러차례로 나눠서 납입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사들은 계약식이 열리는 때 선수금 명목으로 20%를 받는다. 이후 부분 건조(Steel Cutting)가 시작되면 20%, 도크(Dock)에 첫 블록이 안치되면(keel laying) 20%, 배가 진수(Launching)되면 다시 20%를 납입 받는다.


마지막 잔금은 명명식(Delivery) 때 받기 때문에 총 5단계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단계마다 받는 대금의 크기는 계약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큰 틀은 대동소이하다.

대동조선이 전신인 STX조선은 진해조선소를 기점으로 중국까지 조선소 영토를 넓혔지만 아직까지 중국에서 선박을 건조해 선주에게 인도한 선박은 없다. 가장 빠른 인도 시점이 내년 말이다.

선수금은 배를 짓는 데 필요한 운전자금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업 재무재표상에서 부채의 성격을 가진다. STX는 이번 지분인수를 실행하면서 금융권의 도움 없이 자체자금을 썼다고 밝혔지만 실상 부채로 인수합병(M&A)을 실행한 게 된다.

선수금으로 사실상 인수합병(M&A)을 진행한 데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주가를 예상하는 증권가의 목소리는 긍정적이다. 대우증권 성기종 연구원은 "앞으로 들어올 대금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조선소 경영에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투자증권의 송재학 연구원도 "선수금은 부채이지만 현금성 자산이라는 성격도 있어 용처가 분명하다면 문제의 소지는 없다"며 "회사의 가치를 M&A로 올린 걸 높이사야 한다"고 말했다.

STX그룹은 성장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조선업계 후발주자로서 한단계 레벨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이번 지분투자는 긍정적이란 평가다. 조선업계의 숙원사업이던 크루즈선 기술확보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 무게를 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기업의 경영상태와 신용도를 분석하는 신용평가사들의 시각에서는 우려도 엿보인다. 미리 주문받은 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가투입분이 운전자금의 일시적인 부족현상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신용정보의 권성철 수석연구원은 "STX조선의 자금흐름이 큰 문제를 겪을 가능성은 낮지만 원가투입에 필요한 운전자금을 투자자금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중기적으로는 채권발행을 하거나 금융권으로부터 차입을 늘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 중국에서 건조 중인 선박들의 기자재를 살 돈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부족분을 금융차입으로 대신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STX엔진 역시 마찬가지. 이 부족분의 일부는 다시 회사로 유입될 중간대금으로 채워질 수 있지만 나머지는 채권발행 등을 통한 차입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중국 조선소가 내놓을 선박들의 품질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도 경영상의 리스크로 분류된다. 조선업의 경우 완성품의 신뢰도가 미래 현금유입을 결정한다. 때문에 국외 조선소에서 완성될 초기 선박들의 품질에 의해 STX그룹의 미래현금흐름이 결정될 전망이다.

한국신용정보의 심우배 연구원은 이 날 특별보고서를 통해 "STX조선과 엔진 등 양사 신용도의 주요요소인 수주추이, 선수금 증감, 추가투자규모 및 차입금 규모 변동 등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밝혔다.

STX엔진 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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