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한국은 통할 수 있을까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2007.05.1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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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본 세상]한국 패션정보의 세계화에 대해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천국과 지옥을 수차례 오갔다. 삶이, 그리고 현실 자체가 원래 드라마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2차례 열리는 세계의 4대 패션컬렉션이 최근 종료되었다. 뉴욕으로부터 시작하여, 런던, 밀란, 파리로 이어지는 여성복 컬렉션은 향후의 유행에 대한 직접적인 예견이기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다.

우리 회사는 이 4대 컬렉션을 디테일하게 분석하는 일을 하는 '트렌드 애널리스트'다. 그리고 분석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하는 일종의 퍼블리셔(publisher)이기도 하다.



첫번째 천국은 유럽과 홍콩으로부터 왔다. 이탈리아와 홍콩의 명망있는 디스트리뷰터가 우리가 낸 패션정보집을 전세계에 판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이전 시즌의 결과가 썩 긍정적이어서 주문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첫번째 천국을 만끽하기도 전에, 나는 곧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늘어난 오더량을 감당하기엔 인쇄소나 우리나 역부족이었는지, 연이은 인쇄사고로 그만 약속한 선적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패션 정보는 시간을 민감하게 다투는 분야여서, 1-2일의 연착이 빚어내는 손해가 다른 제품들에 비해 상당하다. 생산량이 많아지다보니, 분석을 주로하는 서비스업이 어느샌가 제조업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생산을 관리한다는 하중은 우리 같은 분석가들에겐 생각보다 매우 컸다. 특히 첫번째 오더에 부응하지 못한 결과가 어떤 영향으로 돌아올 것인지를 생각하면 정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한 약속, 멋지게 활용했을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어렵게 얻은 그들의 신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첫번째 지옥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외국의 파트너들이었다. 그들은 '책'에 관한 사업의 프로들이었고, 우리 같은 초보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이해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일부를 다시 찍었고, 이 책들은 예상보다 5일 뒤에 그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선적을 끝내고, 나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밀라노로 출발했다. 약속이나 시간을 어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민망했다. 그리고 출발 직전에, 파트너로부터 도착하는 과정에 약간의 파손이 있었다는 연락까지 받았던 터라, 무거운 마음은 더 깊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그는 매우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파손의 상태는 매우 미미했고, 늦은 선적일에도 불구하고, 디스트리뷰션은 나름대로 순조롭게 원래의 사이클을 찾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파트너는 내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말인즉슨, 현재 한-영 2개국어로 편집된 패션정보를 한글을 빼고, 영어판으로만 찍으면 안되겠냐는 것.

현재의 패션정보 시장은 대부분 유럽이 장악하고 있다. 일본도 일부 내고는 있지만, 유럽의절대적인 비중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들 모두는 페이지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자국어를, 한쪽에는 공용어인 영어를 넣어 제작된다. 따라서 누구든 패션 정보책을 열어보면, 이 책이 어느 나라에서 제작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우리도, 자국어인 한국어와 공용어인 영어를 함께 넣어 패션정보를 제작했다. 그러나 파트너가 리서치해본 결과, 우리 정보에 대해 매우 흥미로워하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한국의 패션정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더를 취소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다른 나라일 척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한국 정보임을 알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는 설명.

그 제안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혼돈을 느꼈다. 우선 그것이 책의 판매를 위해 더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나만 굳이 다른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는 고집이 맞붙어 말문이 막혔다.

한편으론 애초에 수출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들었던 수만가지의 우려들, 즉, 프랑스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한국의 패션정보가 세계화될 수 있겠느냐는 주위의 기우들이 주마등처럼 하나의 영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세상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역시나 리스크란 낙관적인 생각이나 용기같은 것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염려나 걱정, 기우 같은 것들은 반드시 드러나고, 외면할 수 없는 지점에서 결국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의 파트너는 매우 좋은 사람이다. 내가 그를 얻은 것은 가장 감사할 행운 중 하나였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에서 패션의 본고장에, 그것도 '패션 정보'라는 분야를 수출하겠다고 찾아온 우리를, 편견없이 컨텐츠만으로 인정해 준 사람은 지금 생각해보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행운은 거기까지였음을 지금 직감한다. 남은 것은 그야말로 진검승부 뿐이다. 그는 고맙게도 내가 원하는 곳의 출발점에 서게 해주었고, 여기서 어떻게 걸어가느냐는 오롯이 내게 달린 문제이다. 과연 나는, 우리 회사는, 내가 만든 패션정보들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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