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과 비겁 사이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2007.03.23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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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본 세상]결단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단과 비겁 사이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다. 전에는 지나치게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 ‘굳이 저렇게 까지...’라고 생각되던 것이, 이제는 그에게 있을지도 모를 남다른 열정을 보게 된다.

온유한 사람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평안을 느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가 온유한 사람들을 볼때면, 그에게 있을지도 모를 나태와 비겁을 함께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너무 오래 사업을 한 것 아니냐"며 좀 쉬어야 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된 자신이 싫으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세상을 조금 더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를 찾아갔을 때, 모피어스는 두 가지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평화로운 환상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지만 빨간 알약을 먹으면 원치 않는 진실을 보아야만 한다.



세상에는 분명 진실이 알고 싶어서 주저없이 빨간 약을 택해버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종종 파란 약을 택한 사람들로부터 ‘철이 없어 저런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능숙하게 파란 알약을 택하는 것이 과연 성숙한 일일까. 세상의 실체를 보지 못한 채, 보지 않는 법부터 배워버린 사람이 과연 ‘성숙’이라는 것을 경험해볼 수 있는 걸까.

얼마 전 TV를 보다가 독일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던 석탄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심지어 인건비가 석탄값보다 비싸져서 곧 탄광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광부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기사가 계속 나오는데도 아무도 광산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탄광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말이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다른 직업을 찾아보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워 보였다. 탄광은 닫히고야 말거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이것은 외면하기엔 너무 뚜렷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내일 아무 일이 없는 한 결단이라는 것을 내리지 않고 살아간다. 어쩔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그저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은 파란 알약을 먹고 싶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사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문제, 아주 중요한 순간에도 결단이라는 것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먹을 약이 빨간 알약밖에 없는데도 파란 알약을 찾고 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착해서 큰 결단 같은 것은 내릴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럴 때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코 도울 수 없는 타인의 진실을 붙잡고 이뤄지지 않을 참견도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결단과 비겁, 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결단을 잘 내리는 사람과 결단을 끝끝내 내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파란 알약이 주는 환상이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조금씩 비겁할 뿐이다.

자신의 삶에 비겁하고 자신의 미래에 비겁하다면 결국 언젠가는 타인에게도 비겁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오늘 내일 아무 일이 없기에 결단을 미룬다면 그에겐 결국 큰일이 닥치고 만다.

지난 7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크고 작은 결단을 내릴 때마다 나는 진정으로 무서웠다. 미래는 알 수 없고 내게는 책임이 있으니 그야말로 도박 아닌 도박, 최소한의 리스크라는 것이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단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월 탓인지 지금은 위험 요소가 약간의 즐거운 스릴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평균대 체조가 재미있는 이유는 선수가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고 균형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맨 바닥에 줄 하나 그어놓고 체조를 한다면 그처럼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지난 몇 주 동안 우연찮게 결단을 앞에 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다녔다. 어떤 사람은 계속 파란 알약을 찾는걸 보니 결코 결단을 못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표현하지 않아도 그가 두려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이란 빨간 약을 먹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결단을 위한 전주곡과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오롯이 결단이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다.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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