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톤 500만'...숨은 성공코드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2005.03.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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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영화 '말아톤'이 개봉 52일만에 500만 관중을 동원한 것은 가히 '사건'이라고 부를만하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경험론에, 장애인이 주인공이면 흥행은 꽝이라는 징크스까지 짊어진 영화이기에 그렇다.

'극성'으로 분류할만한 마라톤 풀코스 완주자라고 해봐야 국내에 4만명쯤이고, 200만~300만명에 달한다는 달림이들이 영화를 다 봐도 500만명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이다. 수십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가장을 마라톤에 빼앗긴 달림이들의 부인 내지는 가족들로 구성된) 극렬 안티-마라톤 그룹의 심리적 저항(?)을 극복하고 이룩한 쾌거이기에 더욱 '사건'으로 부르기에 충분할 것 같다.



달릴 때 만큼은 똑같다!

말아톤은 엄밀히 말하자면 스포츠영화도 장애인영화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마라톤을 소재로 그려낸 가족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주인공도 초원이가 아니라 초원이 엄마이다.



초원이가 하루먼저 죽는게 소원이라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시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영화에는 엄마가 초원이의 손을 놓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초원이가 어렸을적 엄마는 키우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적 동물원에서 초원이의 손을 놓아버렸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엄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라톤 주로를 향해 달려가는 초원이의 손을 놓아준 것은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였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몸매는? 끝내줘요" "200시간이 아니라 20년을 벌받으며 사는 기분 아세요?"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 "(초원이는 남과 다르잖아요?) 아니요, 똑같아요 달릴때만큼은"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대사들이다.

아마추어 마라톤의 프로들이 제대로 만든 상품


이런 훌륭한 연기, 영화보다 영화같은 실제 소재와 더불어 관객들에게 영화가 리얼리티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영화전문가뿐 아니라 마라톤 전문가들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한강변 달리기 코스, 양재천 마라톤클럽, 춘천마라톤, 서브-3, 포커스마라톤...마라톤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고 단어들이다.
"마라톤? 인간승리같아서 폼나죠? 근데 그게 다 답답하니까 대리만족 얻기 위해 하는거예요..." 이런 말을 남들에게서 혹은 자신으로부터 안들어본 달림이가 없을 것이다.

자신과 옆 주자의 거친 호흡소리, 꿀맛같은 초코파이 한개, 30킬로미터 지점 샤워 오아시스의 상쾌함, 이것도 달려보지 않는 사람이면 영화속에 집어 넣을수 없는 소품들이다.
결국 어설픈 짜깁기와 흉내내기에서 벗어나 '아마추어 마라톤의 프로'들이 가세해 정교한 구성으로 제대로 만든 제품이 500만관객을 끌어모은 것이다.

뉴발란스...순수한 마음이 낳은 대박 광고효과

기본적인 상품경쟁력 외에도 '말아톤'을 보다보면 얼핏얼핏 생각과 눈길이 미치는 경제코드들이 적지 않다.

관객의 눈길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이 화면을 채우고 있는 뉴발란스 상표를 벗어날수 없다. 뉴발란스는 영화제작 훨씬 이전부터 영화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씨를 후원해왔다.

흥행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회사규모에 비해 적지 않은 돈(회사관계자는 정확한 금액은 대외비라고 입을 다문다)을 제작비로 지원한 것은 조용노대표를 비롯, 직원들이 배씨와 마라톤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물건을 알아보는 매니아들을 대상으로 파고드는 '입소문 마케팅'의 효과를 확신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내에 수입된지 몇년 안돼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던 이 회사는 영화성공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됐다. 영화이후 '말아톤 신발'의 인기가 높아져 매출이 30%가 늘었다는 회사측 말처럼 마케팅효과는 제작비에 비할수 없을 정도이다.

뉴발란스보다는 못하지만 초코파이와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도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놀라운 '40대 파워'

초원이가 풀코스에 도전한 춘천마라톤처럼 지방도시에서 열리는 대형 국제 대회는 홍보나 고용유발같은 간접효과 말고 외부인들의 직접적인 소비유발 효과가 대단하다. 춘천마라톤의 경우 직접유발효과가 200억원에 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테니스가 국민소득 5000달러수준의 운동이라면 마라톤은 1만달러대의 운동이다. 팬티 러닝 달랑 걸치고 신발한켤레 있으면 되는 운동이라 별로 돈안드는 저소득층용 운동같지만,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투자돼야 하는 만큼 실제로는 선진국형 고급운동이다. 돈도 사실 생각보다는 많이 든다.

실제로 뉴욕 보스턴 베를린 로테르담 런던마라톤처럼 이름있는 국제대회는 예외없이 선진국에서 개최된다. 대회운영 시스템과 노하우는 물론이고 42.195킬로미터 코스를 뽑아낼수 있는 도로사정, 수만명의 러너 및 가족을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 교통과 사람을 제어할 수 있는 통제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개최가 힘들기 때문이다.
2000년을 전후해 마라톤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우리나라도 국민소득 1만달러대가 정착돼 여기에 맞는 소비구조와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풀코스 마라톤대회 완주자의 절반정도는 40대이다. 40대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이들이 그만큼 경제적 여유를 갖춘 소비계층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노령화사회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며 숫적으로나 지위 권력으로나 우리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40대는 마라톤으로 강철같은 체력까지 갖춰가고 있다.

이들이 기력을 잃을 시기는 더욱 연장될 것이고, 은퇴뒤에도 오래오래 살면서 부양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다. 비정한 이야기지만 10대, 20대들로선 장년층의 마라톤 붐이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마라톤, 새로운 기업·조직문화

지쳐쓰러진 초원이를 앞질러가는 주자의 유니폼엔 '삼천리자전거'라는 회사명이 새겨져 있다. 자기 회사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모습은 마라톤 대회마다 일상사가 됐다. 마라톤은 기업경영과 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라톤이 효과는 있던가요?"라는 영화속 코치의 질문은 개인에게나 조직에게나 우문에 가깝다.

기아부도의 파도에 휩쓸렸던 위아(옛 기아중공업)가 올해 2조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우량기업으로 변신한 배경에 마라톤을 빼놓을수 없다. 김평기사장은 1999년초 재기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고심끝에 마라톤을 선택했다. 위아 직원들의 노란색 유니폼은 마스터즈 대회때마다 선두권을 점령하다시피 하면서 '황색군단'의 명성을 날리고 있다.

역시 부도기업이었던 일화의 이종배사장은 음료수를 월급대신 줘야했던 뼈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섰다. 돈이 없어 홍보를 못하는 처지인지라 직원들이 상품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마라톤 대회마다 거리를 쓸고 다녔다. 직원들이 마라톤을 매개로 단합하면서 법정관리에서도 벗어날수 있게 됐다.

자리에 연연하다 아름답지 못하게 쫓겨나는 공직자들이 널려 있는 풍토에 경종을 울린 김병일(60) 전 기획예산처 장관의 처신도 마라톤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재정운용계획 수립과 총액배분 자율편성제도(톱다운제도) 도입 작업으로 격무에 시달리던 직원들을 독려하며 선두에 서서 한강변을 달리던 그였다. 그는 '마라톤 산행 문화탐방을 하겠다'며 올해초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훌훌 떠났다.

직원 300여명중 100명이 마라톤 동호회원인 예산처가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는 '톱-다운 방식'의 예산편성 개혁을 잡음없이 이뤄내고, 정부혁신 우수 부처로 꼽히고 있는 것도 우연으로 보이진 않는다.

인원의 제한이 없고,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고, 승패의 갈림이 없는 운동. 그러면서도 얻어지는 성취감과 도전의식은 비할데 없는 마라톤은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는데는 그만이다.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은 노조위원장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풀코스를 완주한다. 구자준부회장이 이끄는 LG화재 직원들은 기초체력, 지구력, 자기와의 싸움 같은 마라톤 정신으로 고객들을 물고 늘어진다. 마라톤이 생산성 향상, 다시 말해 '돈'으로 이어질수 있음을 보여주는 기업들이다.

백만불짜리 다리, 끝내주는 몸매!

마지막으로, `말아톤 500만`은 장애인에 대해 우리 사회가 따뜻한 시선을 보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희망을 줬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국가의 지원도 결국은 개인과 사회가 주머니를 열어야 하는 일이다.

비록 당장 눈에 보이는건 미미할 지라도 말아톤이 가져온 의미있는 경제적 파급효과의 하나이다. 한국장애인부모회는 오는 29일 말아톤의 주인공 김미숙과 조승우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김미숙과 조승우는 분명 감사패를 받을만한 일을 했다.

이정도 했으면 "됐으니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말이 돌아올게 분명하다. 핀잔을 각오하고 장문을 늘어놓은건, 개인, 조직, 사회전체의 경쟁력 증대를 위해 달리기에 빠~져 볼만하기 때문이다.(욘사마 Co와 내몸의 ROI)

'백만불짜리 다리, 끝내주는 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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