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살림 팍팍한데 날아드는 정책 청구서…곳간지기 고민 커진다

머니투데이 박광범 기자, 최민경 기자 2024.04.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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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포스트 총선 (下)

편집자주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났다. 수많은 정책공약이 나왔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은 부족했다. 진영논리와 정치공학 속에서 외면했던 총선 이후 과제들을 살펴봤다.

24차례 민생토론회서 쏟아낸 240개 정책…'기재부의 시간' 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일인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사진제공=기재부 /사진=(서울=뉴스1)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일인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사진제공=기재부 /사진=(서울=뉴스1)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막을 내리면서 이제 정부(기획재정부)의 시간이 돌아왔다. 올해 들어 대통령 주재 민생토론회를 통해 쏟아낸 정책 과제들에 수반되는 비용 청구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가 '건전재정'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해 56조4000원 규모의 역대급 세수 결손까지 발생한 터라 수많은 정책 과제를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10일 정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전국을 돌며 주재한 민생토론회는 24차례로, 총 240개의 정책과제에 대한 후속 조치가 진행될 예정이다.

지난 1월4일 기재부의 2024년 경제정책방향 발표가 첫 민생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일반분야 연구개발(R&D) 투자 증가분에 대한 세액공제, 상반기 신용카드 사용금액 소득공제 확대, 노후차 개별소비세 한시 인하, 상반기 전통시장 소득공제율 상향 등을 발표했다.



이후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비과세 혜택 확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위한 세제지원 확대 △늘봄학교 전국 확대 △출산지원금 전액 비과세 △32개 부담금 폐지·감면 등의 정책을 연이어 내놓았다.

문제는 돈이다. 1~3월 민생토론회에서 발표된 정책들이 최소 수십조원 규모의 재정 지출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 위기 속 건전재정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의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긴급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 1500억원 추가 투입 등 고물가 대응을 위한 재정 지출과 앞으로 깎아주겠다고 약속한 세금까지 감안하면 나라살림은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유류세 인하와 같이 이미 깎아주고 있는 세수 부담도 시간이 갈수록 누적되고 있다.


기재부는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5년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72조2000억원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2.9%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윤석열정부 집권 후 처음으로 재정준칙을 지킬 것이라는 예상이다.

민생토론회발 과제만으로도 이같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에 정치권의 총선 공약 청구서까지 더해지면 정부 재정건전성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최근 확대간부회의에서 "기재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고민의 맥락으로 읽힌다.

기재부는 지금까지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발표된 신규 정책과제 재원 조달방안과 필요 재원규모에 대해선 최대한 말을 아껴왔다. 정책 시행에 따른 세수 감소 등 재정건전성 우려 지적에 대해선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해왔다.

하지만 내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이 최근 확정되고 각 부처들로부터 예산 요구안을 받는 등 2025년도 예산 편성 절차가 본격화하면서 '선거 이후'에 대한 고민이 현실로 다가왔다.

검토가 아닌 결론을 내릴 시점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당장 다음달 열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시작으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세제개편안 발표 △2025년도 예산안 확정 과정에서 민생토론회에서 제시된 정책 과제들의 현실화 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총선 이후 주요 정책스케줄/그래픽=김다나총선 이후 주요 정책스케줄/그래픽=김다나
다만 정부 재정상황을 고려했을 때 민생토론회에서 발표된 정책을 모두 이행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평가다.

무엇보다 국가 재원의 효율적 배분과 재정건전성을 고려해 정책을 세워야 하는 기재부가 민생토론회 형식 아래에선 대통령실이 던진 숙제를 수습하는 데 급급했단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정치의 시간이 지나고 기재부의 시간이 돌아온 만큼 기재부의 존재가치를 보여줘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정권이 재정을 많이 써 재정건전성을 악화시켰다면 이번 정권은 감세로 세수를 줄여 건전성이 악화되는 문제를 발생시켰다"며 "기재부가 추가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리거나 감세 정책을 펴는 것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기 때문에 민생토론회에서 나온 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수용했다간 재정이 감당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발표된 정책들 중에선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이뤄줘야 할 것"이라며 "특히 선거가 끝나 정치적 계산법에서도 훨씬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가장 체감할 수 있는 민생정책 실현에 초점을 맞춰야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기요금·전기본 발표 곧…'에너지의 시간'도 다가온다
  19일 서울 시내 한 오피스텔에서 관리인이 전기계량기를 살펴보고 있다. 2024.2.19/사진=뉴스1  19일 서울 시내 한 오피스텔에서 관리인이 전기계량기를 살펴보고 있다. 2024.2.19/사진=뉴스1
총선 이후엔 '에너지의 시간'도 다가온다. 민심을 의식해 미뤄뒀던 전기·가스요금 현실화부터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는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재무상황 회복을 최우선으로 두고 국민 동의를 구해야한다. 우리나라 전력 수급의 청사진인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초안도 총선이 끝난 직후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클러스터, 데이터센터 등에 대규모 전력이 투입돼야 하는 상황에서 탄소중립까지 고려한 에너지믹스(조합)를 짜는 것이 관건이다.

10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한전과 가스공사의 정상화를 위해 하반기부터 전기·가스요금 추가 인상을 검토할 예정이다.

올해 들어 전기·가스요금은 동결된 상태다. 지난해 4분기까지 인상이 이어졌던 전기요금은 올해 1·2분기 동결됐다. 가스요금도 지난해 5월 메가줄(MJ)당 1.04원을 인상한 이후 현재까지 동결이다. 총선 전까진 물가 부담을 이유로 요금이 동결됐지만 한전의 누적 적자와 가스공사의 미수금 해소를 위해 올해 전기·가스요금 추가 인상은 불가피하다.

한전은 '자본금+적립금'의 5배까지 한전채를 발행할 수 있다. 지난해 연간 4조5000억원대 영업손실을 반영하면 올해 한전채 발행 한도는 약 87조5000억원이 될 전망이다. 현재 한전채 잔액은 약 80조원으로 발행 한도 턱밑까지 찼다.

가스공사의 민수용 미수금 규모도 13조원을 넘겼다. 부채비율도 480%를 넘겼다. 가스공사 우리사주조합에서는 정부가 재정지원을 통해 미수금을 회수해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주무부처인 산업부는 전기요금 인상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지난 1월 인사청문회 당시 "적절한 시기가 되면 국민 부담, 환율, 국제 에너지 가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단계별로 요금을 조정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국제유가가 배럴 당 90달러 이상 오름세인 것도 요금을 조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구매하는 가격인 계통한계가격(SMP)이 국제유가에 영향을 받아 높아지면 한전에 재무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하반기부턴 요금 현실화를 위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아울러 향후 15년간(2024~2038년) 적용할 국가전력정책 방향이 담긴 11차 전기본 초안도 이르면 이달 중 공개한다. 11차 전기본 수립 총괄위원회는 현재 신규 원전 건설 규모, 신재생에너지 비중 등 주요 쟁점을 두고 막판 조율 중이다.

이번 전기본엔 소형모듈원전(SMR)이 처음 반영되며 신규 원전이 2~4기 반영될 것으로 전해졌다. 집단에너지도 새롭게 편입될 전망이다. 신규 원전 추진 정책이 총선을 앞두고 공개될 경우 정쟁 도구로 비화할 수 있다는 부담이 커지면서 늦춰진 것으로 풀이된다.

11차 전기본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가 반영된다. 막대한 전력 수요에 탄소중립까지 고려한 에너지 믹스를 계획해야 하는 만큼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총선 후 남은 한달…정부, 고준위법·유통법 민생법안 통과 주력
제22대 총선을 사흘 앞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4.4.7/뉴스1  제22대 총선을 사흘 앞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4.4.7/뉴스1
총선이 끝났다고 21대 국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 21대 국회 회의는 5월 29일까지다. 마지막 민생법안 처리 기한이 한달 남짓 남아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민생 관련 법안의 처리를 위해 국회 설득에 나설 계획이다.

10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 계류된 주요 법안은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 개정안,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 해상풍력 특별법 등이다.

유통법은 대형마트 주말 의무휴업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현행 유통법은 자정부터 10시까지 대형마트는 영업을 할 수 없고 월 2회 공휴일에 의무 휴업을 실시해야 하며 의무휴업일에는 온라인 배송도 할 수 없다. 대형마트 새벽배송에 대한 국민 수요가 높은 만큼 주말 의무휴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지만 유통법은 산자위 소위에서부터 여야 의견이 갈린 채 계류돼 있다.

고준위 특별법 역시 처리가 시급한 법이다. 2030년부터 한빛, 한울, 고리 원전 순서로 습식 저장조가 포화된다. 방폐장을 짓는 데 30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처리 시설 부족으로 원전 발전을 멈춰야 할 수도 있다. 여야는 처분시설 확보 시점 명시, 원전 내 건식저장시설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용량 등을 두고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가 해상풍력발전 입지를 선정하고 인허가를 단축해 주는 해상풍력 특별법도 처리가 시급한 법안 중 하나다. 정부가 주도권을 갖고 해상풍력 입지를 발굴하고 주민 협의부터 인허가 등 모든 절차를 지원해 해상풍력 보급을 확산하는 게 골자다. 법을 통과시켜달라는 업계의 목소리가 크지만 지난해 6월 이후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계류된 법안들이 이번 회기 내 위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 수순을 밟는다. 법안이 폐기될 경우 다음 22대 국회에서 법안 발의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부터 모든 과정을 새로 시작하는 만큼 행정력이 낭비될 수 있다.

정부는 총선이 끝난 만큼 국회 설득에 나설 계획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이번 총선 결과와 무관하게 21대 국회 내에서 시급한 민생 법안을 처리하고자 노력할 것"이라며 "공천을 받지 못한 의원들도 임시 국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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