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대가로 내놓은 테스트…이세돌은 멋진 프로였다

머니투데이 신혜선 문화부장 2016.03.13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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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세돌 vs 알파고] 3국 현장 관전평…"프로라면 두지 않는 돌로 알파고의 '패'실력을 끄집어 내다"

편집자주 '쿨투라'(cultura)는 스페인어로 문화다. 영어 '컬처'(culture)나 '쿨투라' 모두 라틴어로 '경작하다'(cultus)에서 유래했다. 문화는 이처럼 일상을 가꾸고 만드는 자연적 행위였는데 언제부터 '문명화된 행동', '고급스러운, 교양있는'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니게 됐을까. 여전히 문화는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이 맞다. 21세기가 시작된지 15년. 30년, 50년 후의 우리 사회의 문화양식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까. 특히 인공지능, 생체인식과 같은 과학IT기술 발달로 사람과 자연외에 공존하게 되는 또 다른 무엇이 다가온다. 그 시대의 문화는 어떻게 달라질까.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면서 새롭게 진화하는 문화의 모든 모습을 함께 살피고 나누고자 한다.

인공지능 바둑 기사에 도전중인 이세돌 9단.인공지능 바둑 기사에 도전중인 이세돌 9단.


“예, 테스트였습니다. 해볼 건 다 해 봤고, 이제 대략 테스트는 끝났다고 봅니다.”

12일, ‘구글 딥마인드 챌린치 매치’ 제3국이 열린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6층 복도. 현장 해설을 맡은 이현욱 8단이 보인다. 시간이 없다며 이동하려는 그를 붙잡고 딱 한 가지만 답해달라 했다.

“마지막에요, '수가 없는 상황에서 수를 만들었다'고 하셨어요. 이세돌 9단은 진 게임인 거 알았지만, 알파고의 패싸움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수라는 말이죠? 경기중, 알파고를 대놓고 테스트한 거라고 봐도 되나요?”



오후 4시경, 바둑판 아래쪽은 그야말로 백 세력이 어마어마했다. “설마, 여기에 들어가는 건….” “프로 선수 경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깨끗하게 승복하고 말죠.” 해설자도, 진행자도 이렇게 ‘설마’ 했다.

하지만 이세돌은 그곳에 착수했다. 백 98에 아래로 딱 붙인 115수, 그리고 125수. 불계패인 결과만 놓고 보면 그 수는 의미 없다. 하지만 다르게 볼 이유는 있다. ‘알파고는 패를 할 줄 모르는 것 아니냐’, ‘패를 싫어하는 듯하다’는 인간의 추측을 실제 파악할 수 있도록 알파고를 끌어내는 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프로라면 절대 놓지 않는 곳, 그 '어이없는' 돌을 착수한 후 그는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이현욱 8단은 "시쳇말로 ‘창피한’, 일반 경기라면 절대 두지 않는 그런 착수를 한 찹찹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난다"고 해설했다.

그 돌 하나는 이세돌 9단을 승리로는 이끌지는 못했지만 알파고를 ‘피곤하게(?)’ 했다. 끝내 알파고는 더는 회피하지 못하고, 이세돌 9단이 만든 패에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 실력조차 훌륭하다는 점’이 만천하에 공개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세돌 9단이 도모하지 않았으면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결과였다.

알파고는 열 집을 내주고도 열두 집을 얻으면 그만이다. 구태여 모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패 형태가 나올법한 곳은 아예 패를 없앴다. 경기중 ‘맛’을 남겨두지 않고 끝내기 수순에 해당하는 돌을 놓아 맥을 빠지게 했다.


이런 조건에서 이세돌 9단은 결국 패를 만들고 좌하귀까지 이어지는 대마 싸움 형국을 만들어 알파고가 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알파고의 승률 계산상 그곳을 내주고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결과는 176수 만에 알파고의 불계승이었지만, 이현욱 8단은 “4, 5국은 지켜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4국, 5국의 승리를 자신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해볼 만 하다는 의미는 담겨 있다. 그는 "이세돌 9단의 표정이 좀더 편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3국이 앞 전 대국과 달리 받아들여지고, 이세돌 9단이 진정한 프로라는 여운을 남긴 건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초반 ‘공격형 바둑’(이현욱 8단은 이세돌 9단이 십 대 때 주로 뒀던 기풍이라고 말했다.)도 좋았지만, 패색이 짙어진 후에도 알파고에 대한 테스트를 멈추지 않았다. 표정도 눈빛도 확인할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벽이었지만 이세돌 9단의 주특기인 '흔들기'를 구사했고, 프로기사의 경기라면 절대 두지 않는 창피한 수조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파고의 기풍이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경기에 응했다면 이세돌 9단의 선택은 필연 아닐까. 비록 늦었지만, 그 수준에서라도 알파고를 최대한 파악하기. 적을 알기 위한 노력에 혼신을 다하며 가장 겸손한 자세로 경기에 임한 셈이다. 이세돌 9단의 3국을 보고 비록 패했지만 "1, 2국 때와 다르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세돌 9단의 그 승부기질과 자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기계처럼 싸울 수 없다. 바둑계 최고의 강심장이라는 이세돌 9단도 심리적 압박감을 토로했다. 기계를 이기기 위해서 기계처럼 사고하면서 기계의 방식을 이해하는 게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응수는 가장 이세돌다울 수밖에 없다.

1200여대 서버에 담겨있는 기보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신의 한 수'를 기대하는 대신, 3국에서 보여준 포기하지 않는 이세돌의 도전 정신을 4국과 5국에서도 만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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