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대학 및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성과가 제품·서비스로 구현되려면 실제 현장에서 작동 가능한가를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제품의 현장 적용성, 기능 구현 여부를 확인하고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기업들이 이 기술에 대한 사용료를 내고 흔쾌히 쓸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기술사업화 성공은 쉽게 말하면서 실증연구는 간과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 분야 전문가인 A씨는 "국책 연구과제를 받아 신기술을 개발했어도 '중복연구'라는 이유로 이를 실증할 후속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연구소기업 B사는 최근 대형 파이프 내에 결함을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의 궁극적인 활용처는 원자로다. 그러려면 촬영 장비를 옮겨 다닐 수 있는 로봇과 배터리, 촬영한 영상을 원자로 밖으로 송출할 수 있는 기술 등을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관련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서랍속 기술로 묵혀두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사업화 성공 경로에 결정적인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일을 전담할 실증단지를 지자체별로 앞다퉈 조성하고 있지만 가보면 건물만 덩그러니 있거나 실제 필요한 기자재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게 연구자들의 하소연이다. 그나마 정부가 특정 지역에 실증단지를 짓겠다고 발표하면 다른 지자체에서 특혜 지원이란 논란을 일으켜 사업이 연기 혹은 보류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여의치 않다 보니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고 특허를 내는 정도로 과제를 마무리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A씨는 "논문, 특허 중심으로 성과평가가 이뤄지니 연구자들이 굳이 힘들게 실증연구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올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27조 원에 육박하나 시장에선 "쓸만한 기술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 3위권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유한 독일에선 1884년 설립된 실증 전문 기관인 MPA(Materials Testing Institute)가 국가 R&D 성과를 민간에 이전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ICT(정보통신기술) 창업의 요람이라 불릴 정도다.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스타트업 업종별 분포도에서 AI(인공지능), 자율자동차 등 첨단 ICT 분야가 31.8%에 달할 정도다.
정부가 연구성과 창출과 창업·벤처 지원에 많은 혈세를 쏟아 붓고 있지만, 정작 연구성과와 시장을 연결하는 중간 실증단계가 끊어져 기술이 사장되는 현재의 모순을 그냥 방치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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